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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웨일즈」사람 셋이 모이면 노래를 같이 부르고 불란서 사람 셋이 모이면 정당 셋을 조직하고 영국사람 셋이 모이면 줄을 선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유럽」에서 각나라의 특색들을 들어 비유해서 말한 것인데 이밖에도 「네덜란드」사람 셋이 모이면 꽃을 가꾸고 독일 사람 셋이 모이면 군대행진을 한다는 등 이야기는 더 계속된다.
얼마전 세종로에서「택시」를 줄지어 기다리다가 이런 이야기를 문득 생각하면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질서정연하게 말한마디 없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던 영국사람들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부러워졌다.
그날 세종로에서의 광경은 영국에서 겪었던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택시」가 잘오지 않아 시간이 급한 김에 그랬다고 이유를 붙일지는 몰라도 첫 번째 「택시」가 올때부터 새치기가 시작되었다. 맨처음 차를 잡아탄 사람은 줄에도 서지않고 도로에서 서성거리던 사람이었는데 차를 잡아타는 「스타일」이 기가 막혔다. 차가 멈추기전에 같이 뛰어 따라오더니 살짝 문을 열고 타는 폼이 하도 재빨라서 차는 서지도 않고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줄에 섰던 사람들이 뭐라고 한마디씩 했으나 그때「택시」는 이미 2, 3십m전방을 달리고 있었으니 닭좇던 개지붕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나는 「릴레이」경기에서 멋지게「바통·터치」를 하고 뛰어가는 선수를 연상하며 좋은 구경했다고 자위했다.
비호같이 날쌘 손님한테 선수를 당하고 난 뒤줄에서 있던 사람들도 이젠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택시」한대가 올 때마다 대여섯명의 손님이 달려들었다. 밀고제치고하는 바람에 여자나 노인들은 차를 탈 수 있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너무 성급하게 차의 「도어·핸들」을 붙들고 따라오다 힘에 겨워 손잡이를놓친 다음 다른손님이 차례로 차에 타 있는데도 운전수한테 달려와서 『날치어 죽일 작정이냐』등의 시비를 붙이는 것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
나는 얼핏 이런 생각을 해봤다. 『새치기를 해서라도 빨리가는 것이 제일이지. 줄에서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낙오자가 아닌가』-「택시」타려고 줄섰던 사람들이 모두 질서를 지키지 않고 또 내가 질서있게 차를 타는 것을 본일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치기하는 것이 습관화되고 더 나아가서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무관심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 더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 습관화되고 이젠 무관심하게 된 또다른 예가있다.
흔히 당하는 일이지만 공공건물 안에있는 남녀공동용 화장실의 이용이다. 남자하고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올 때 마주치면서 느끼는 바지만 무안하고 어색할 뿐아니라 더큰 문제는 같은 화장실안에서도 흔히 남자를 위한 시설은 간막이가 없어서 마치 대로에 서서 용변을 보는 느낌을 갖곤했다. 어떤 나라에는 남녀 혼탕도 있고 나체 「클럽」이 많은 세상에 넌 무슨 잠꼬대냐 하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긴하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불리어왔다.
해석이 여러 가지 이긴 하겠지만 명예스러운 이「타이틀」이 점점 예의도 없고 질서도 없어져서 「챕피언·쉽」을 이미 빼앗긴 것이 아닌가 하는 자탄과 함께 하루바삐 명실을 갖춘동방예의지국에 부끄럼이 없는 날이 오기를 빈다. 현경호 <과기연 기술정보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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