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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다는 하리마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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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인식
정치국제부문 기자

강력반은 경찰의 정신이니까, 죽어도 해야겠다고 무작정 매달렸다. 경찰 생활 7년 만인 2002년 강력반에 배치됐다. 시작하자마자 살인 사건이 터졌다. 25세 남성. 칼에 찔린 자상 20곳.

 밤이었다. 겨울이어서 온돌 바닥이 따끈했다. 방바닥을 덮은 피는 젤처럼 말캉말캉해졌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반장이다. “흔적을 찾아라.” 초짜는 여기저기에 피가 묻는 것도 모르고 현장을 뒤졌다. 며칠 뒤 살해된 자가 에이즈 환자란 걸 알게 됐다. 감염에 대한 공포와 절망이 뒤섞인 그때의 감정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유도·합기도 유단자여서 남자 하나는 넘어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필요한 건 완력이 아니었다.

 그렇게 7년을 버텨 2009년 ‘으뜸 여경 대상’을 받은 김성순 경위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난 그에게서 경찰의 진짜를 봤다. 기획이나 정보 파트를 거쳐야 승진이 되고 수사보단 정치를 잘해야 하는 게 현실일 거다. 하지만 그를 보면서 경찰을 위해 세금을 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강력반 형사가 주인공인 영화가 계속 히트를 쳐도 괜찮겠다 싶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에게 국정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하리마오’다. 공작원을 가리키는 하리마오의 본디 뜻은 호랑이(외롭지만 강한)다. 국정원에서 하리마오는 경찰의 강력반이나 국군의 해병대쯤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영화 ‘베를린’의 한석규(정진수 역)는 공작원이다. 완벽하게 정의롭진 않지만, 그래도 강력반 형사처럼 근성과 사명감으로 현장의 밑바닥을 지켜낸다. 이런 이들이 꽤 있을 거란 기대가 나에겐, 아니 우리 사회엔 있다. 하리마오가 국정원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직의 정신은 될 거란 기대. 그래서 이 캐릭터에 감정이입 되고, 많은 이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보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안기부 시절을 졸업한 대한민국은 CIA나 모사드 같은 정보기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뛰어난 두뇌와 육체를 지닌 공작원이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발전하는 조국에 걸맞은 정보기관의 변화를 상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 국정원 댓글 사건이 터졌을 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엘리트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골방에 앉아 댓글을 단다? 오해겠지. 소수의 일탈행위이거나. 정보기관의 댓글 공작이라니, 좀 그렇잖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댓글을 다는 행위가 국정원의 일상 업무 중 하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제이슨 본은 아니더라도 국정원에 한석규 정도의 공작원은 깔려 있어서, 강력반 형사를 보는 것 같은 애잔함으로 그들이 나오는 영화를 봐도 될 거란 생각이 이젠 많이 불편해졌다. 물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 다수일 거라 믿는다. 하지만 댓글이 국정원의 업무라는 사실이 주는 허탈과 실망·냉소·자괴 같은 기분을 당장은 어쩔 수 없다.

 댓글 다는 하리마오.

 ‘ㅋㅋㅋ’ 외엔 달리 표현할 댓글이 없다.

강인식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