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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고급 일자리 양산…상습 알바생 부작용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세브란스병원 임상시험센터 병실에서 젊은 참가자가 약을 복용하고 있다.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1상 단계를 거친 뒤 환자를 대상으로 더 큰 규모의 임상시험에 들어가게 된다. [사진=세브란스병원]

“시설이 깔끔하고 TV와 인터넷도 마음껏 즐길 수 있어요. 방학을 앞두고 개인 일을 보며 돈도 벌 수 있는 기회죠. 환자에게 꼭 필요한 신약을 테스트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보람도 있습니다.”

28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제중관 2층 임상시험센터에서 만난 오모(26·대학생)씨의 표정은 밝았다. 55개 병상이 있는 대형 병실에는 오씨 외에 10여 명이 누워 있었다. 한 제약회사의 류머티즘 치료제 신약개발을 위한 제1상 임상시험 참가자인 이들은 마무리 검사를 위해 병원에 들렀다. 총 64명의 참가자들은 6월 초부터 투약과 함께 두 차례의 입원, 10여 차례의 외래 검진을 거쳤다. 한 달간 신약 효과 검증에 참여한 뒤 받은 대가는 99만7000원.

이들처럼 건강한 사람만 임상시험을 하는 게 아니다. 말기암 등 난치병 치료제 신약의 임상시험이 시작되면 환자들의 자발적 참가가 줄을 잇는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항암제 등 난치병 신약의 임상시험을 앞두면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자신도 참여하게 해달라는 민원이 쏟아진다”며 “임상 참가자는 의사와 연구진이 엄격하게 선정하기 때문에 민원은 의미가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읍소해 난감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임상시험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세계적 수준이다. 일반인들의 참가도 늘고 인식도 개선됐다. 항암제 등 난치병 신약의 임상시험에는 자원자들이 줄을 선다. 방학을 맞아 젊은 학생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하지만 임상시험이 의료 산업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으려면 전문가 양성과 의료 윤리 개선 등 과제도 남아 있다.

임상시험 후 월 1000만원 약 공짜로 받기도

임상시험은 성장 산업이다. 국가임상사업단에 따르면 2002년 55건에 그쳤던 임상시험 건수는 지난해 670건에 달했다. 10년 만에 12배 늘었다.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미 국립보건원(NIH)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임상시험(신약 시험 건수 기준)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세계 16위(비중 1.97%)에서 지난해 6위(3.83%)로 올라섰다. 일본(10위)과 중국(14위)을 앞질러 아시아 1위다.

건수뿐이 아니라 수준도 높아졌다. 항암제 등 각종 신약의 임상시험을 미·일·유럽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하는 경우가 늘었다. 해당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게는 행운이다. 기존 약물로 고치기 어려운 병을 치료할 기회를 잡는 것은 물론, 비용 측면에서도 큰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 방영주 원장은 “수년 전 시작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크리조티닙(화이저·상품명 잴코리)의 경우 임상시험 참가자들은 시판 가격 기준으로 월 1000만원이 넘는 약을 아직도 무상으로 공급받는다”고 말했다.

산업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신약 임상시험의 세계시장 규모는 2012년 기준 약 80조 원에 이른다. 국내 시장 규모는 연 1조원으로 추정되지만, 앞으로 훨씬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고급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방영주 원장은 “의사는 물론 연구간호사, 모니터전문가, 임상약리학자, 통계학자 등 수많은 전문가가 함께 일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임상시험이 늘면서 기획·진행을 담당하는 일종의 중개회사인 임상시험 수탁대행기관(CRO·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도 급증하고 있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다국적 기업과 연계된 외국계 CRO의 진출도 눈에 띈다.

한국이 임상 연구의 메카로 떠오른 비결은 뭘까. 세계 최대의 다국적 CRO인 퀀타일즈 트랜스내셔널 코리아의 신수경 상무는 “한국은 우수한 연구자와 발전된 장비를 갖췄으며 임상시험 사례가 늘어나면서 신뢰성도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LSK글로벌파마서비스의 김성재 부사장은 “서울처럼 한 지역에 세계적 수준의 임상시험을 할 수 있는 초대형 병원이 몰려 있는 나라도 드물다”며 “다양한 인구 집단이 형성돼 각종 질병을 가진 임상시험 대상자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강점”이라고 말했다.

임상시험 덕에 의학 연구도 활기를 띤다. 서울대병원 의생명연구원의 경우 연간 1500편이 넘는 SCI(과학논문색인)급 논문을 쏟아내는 국내 최대 연구기관이다. 상당수가 임상시험 관련 연구다. 방영주 원장은 “임상시험 중에서도 연구 측면에서 가치가 높은 것은 초기 임상, 특히 사람에게 처음 적용하는 이른바 ‘퍼스트 인 휴먼 스터디(제0임상·Phase 0)’가 중요하다. 과거에는 드물었던 이런 초기 임상에 대한 의뢰가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도 활발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임상제도과 왕소영 연구관은 “외국의 신약 기준을 조속히 국내에 적용하는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루타·매혈…부정적 인식이 걸림돌

하지만 임상시험이 의료 산업의 한 축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개선점도 많다.

외국 회사들이 주문한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임상시험을 계획하고 진행해야 부가가치가 높다. 연세대 약학대학 이장익 교수는 “안전성을 보장하면서 연구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임상 설계·코디네이터가 많아져야 임상 연구의 수준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사회적 인식의 개선도 과제다. 아직도 임상과 생동성 시험에 참가하는 이들을 ‘마루타’로 부르거나, ‘매혈(賣血)’에 빗대는 인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방학이 가까워지면 손쉽게 몇십만원을 벌기 위해 임상시험이나 생동성 시험에 참가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크게 늘어난다. 생동성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의 관계자는 “마치 우리가 돈 때문에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게 불편하다”며 “우리는 희망자만 연결해 줄 뿐, 대상자 선정과 시험 자체는 전문 의료진이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세워 진행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일반인이 참가하는 초기 임상이나 생동성 시험은 일부의 우려와 달리 위험성은 높지 않다. 한 임상시험 관계자는 “신약은 동물을 대상으로 한 독성 실험 등을 충분히 거쳐야 사람에게 적용된다. 지금까지 임상이나 생동성 시험에서 건강한 자원자가 사망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보인 사례는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윤리 측면에서 제기되는 우려다. 임상시험을 ‘자발적 봉사’라기보다 ‘돈벌이 수단’으로 인식하는 젊은이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의 한 임상시험 경험자는 “세 번 해봤다. 며칠 입원하고 피만 뽑으면 편의점에서 한 달 일한 것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 친구 중에는 두세 달에 한 번꼴로 참여하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생명윤리학회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매혈을 법으로 금지한 것은 피를 뽑는 게 위험해서가 아니다. 근본적인 의료 윤리의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생동성이나 임상 참가를 ‘알바’ 삼아 빈번하게 참여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장기적으로 헌혈처럼 자원봉사의 비중을 늘리고, 동일인이 너무 자주 반복해 참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녕·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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