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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42년 하니까 역사도 보이고 사람도 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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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인명진 목사의 갈릴리교회는 깐깐하게 후임 목사를 선택했다. 전체 교인의 절반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지를 새 담임목사 후보에게 따져 물었다. 인 목사는 “목사와 장로의 선택권을 평신도에게 넘긴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개신교 예장통합 교단 소속의 인명진(68) 목사는 ‘정치목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그는 노동운동 투사였다.

 공안당국이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 들어가면 그 회사는 도산한다”는 말을 퍼뜨릴 정도로 껄끄러워하던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의 터줏대감이었다. ‘도산’에서 일한 12년 동안 네 차례 투옥돼 만 3년 넘게 복역했다. 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그가 다시 세인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건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맡으면서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두 달간 자신을 고문했던 ‘유신 세력’이 남아 있는 소굴로 그는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인명진이 변절했다”고 수군거렸다.

 그런 인 목사가 현역에서 조기 은퇴한다. 86년 설립해 27년간 키워온 서울 구로동 갈릴리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려놓는다. 교인들 동의를 얻어 이미 후임자 청빙(請聘)을 마쳤다. 후임 목사의 교회 적응을 위해 연말까지만 동역(同役·함께 사역)한다.

 인 목사는 “내가 은퇴한다고 하면 인명진이도 목회를 했느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목회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고 했다. 그래서 “은퇴 인터뷰를 정치부 기자가 아닌 문화부 종교담당 기자와 하고 싶었다”고 했다. ‘목사 인명진’에 더 방점을 찍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정치 얘기가 나와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안철수씨에 대해 “속이 차지 않은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26일 교회 목양실에서 인 목사를 만났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그는 특유의 충청도식 유머, 낙천주의가 넘쳤다. 과거, 수난의 그늘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지한 대답인지, 과장 섞인 농담인지 주의 깊게 들어야 했다.

 - 원래 정년은 언제까진가.

 “만 70세가 되는 2016년 말까지다. 3년 반 먼저 그만두는 거다. 20대 후반에 목사가 돼 올해로 42년째다. 성경을 보면 모세도 40년밖에 안 했다. 내가 뭐라고…. 원래 2년 전 은퇴하려고 했는데 교회 재정문제 등 마무리 지을 일이 많더라. 사람들이 기분을 묻는데, 꼭 애인 뺏기는 기분이다. 애인이 다른 남자 만나 도망가는 걸 목격한 20대 청년의 기분이랄까.”

 - 속이 부글부글 끓겠다.

 “실은 정신적으로 굉장히 오랫동안 은퇴를 준비했다. 정년이 돼서 떠나면 밀려나는 것 같아 상당히 비참할 것 같더라. 하지만 마음속에 이건 내 교회다, 그런 생각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나만큼 누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아들이나 사위 중 목사가 없어서 그렇지 만약 있었더라면 물려줄 수도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일성·김정일이 이해될 정도다.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은퇴하면서 돈이라도 챙기려는 목사가 나오는 것 같다.”

 - 은퇴하는 목사의 상실감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바깥에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교회 일을 취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000일 새벽기도를 한 적 있는데 당시 고향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새벽마다 서울 교회로 돌아와 5시 반 새벽기도 약속을 지키며 장례를 치렀다. 갈릴리교회는 20년 넘게 교인들과 울고 웃으며 운명을 함께한 내 인생의 터전이다. 내 인간관계의 전부가 이 교회에 있다. 은퇴는 그 모든 것을 뺏기고 혼자 덜렁 남는 거다. 그러니 쉽겠는가. 은퇴하면 교회에 다시 나와서도 안 된다. 이상하게도 종교는 굉장히 독점적이다. 여왕벌이 하나뿐인 꿀벌의 세계와 같다. 목사가 둘일 수 없다.”

인명진 목사는 “가난한 사람을 예수로 섬기는 깨어 있는 신앙체험을 하고 싶다”고 했다.

 - 그렇게 힘든 일을 왜 앞당겨서 하나.

 “교회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거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있을 때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끝이다. 내가 안 하면 교회 망할 거다? 어림도 없는 얘기다. 인명진 목사 없는 갈릴리교회를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얘기는 다 아부, 사탄의 속삭임이다. 후임 최호득 목사는 부산에서 작은 목회를 하시던 분이다. 교계 내에서 무명 인사다. 하지만 수소문해 본 결과 우리 교회를 제대로 섬기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거 하나 보고 모셔왔다.”

 인 목사의 조기 은퇴 이유는 또 있었다. “은퇴 목사의 퇴직금 때문에 시끄러운 경우가 있는데, 그런 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한국교회의 짐이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은퇴조건을 먼저 교회에 제시했다. 퇴직금은 근로기준법을 적용한 액수인 2억원, 은퇴 후 사례비는 공무원연금법을 적용해 올해 받은 월급의 70%만 매달 받기로 했다.

 갈릴리교회는 주일 출석 신자가 500명 정도인 크지 않은 교회다. 인 목사가 외형 늘리기를 싫어한 결과다. 그는 올해 활동비 100만원을 제외하면 한 달에 415만원 정도 받았다. 월급이 적다 보니 퇴직금도 적다. 대개 은퇴 목사에게 제공하는 사택도 인 목사는 거부했다. 명의를 교회로 했다. 자신과 사모가 사망하면 사택을 교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주변 목회자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란다.

 - 예상보다 훨씬 쾌활하신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교인들하고 고스톱 치는 목사는 나 혼자일 거다. 이따금 교인들과 여행 가면 점 1000원짜리 고스톱 친다. 최근 골프를 시작해 가끔 교인들과 내기 골프를 치는데 타수를 속이지 않으면 잃는다. 고스톱은 여간해선 안 잃는다. 목사는 고스톱도 잘 쳐야 한다. 영감으로 치는 거 아닌가. 40년 목사 하니까 반 귀신 됐다. 고스톱 패도 보이고, 역사도 보이고, 사람도 보인다.”

 이 대목에서 화제는 정치 쪽으로 튀었다. 자신의 ‘감식안’을 말하던 인 목사가 안철수 얘기를 꺼내면서다.

 “내가 예전부터 법륜 스님, 윤여준씨하고 가까웠다. 그분들이 지난해 대선 전에 자꾸 안철수를 만나보라고 했다. 청주에서 열린 청춘콘서트에 참석했다. 이 사람이 정말 대통령감인가, 나름 살펴봤다. 한 3시간 정도 겪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윤여준씨에게 전화 걸어 ‘안철수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나중에 윤씨가 안철수씨에게 봉변 당하지 않았나. ‘윤여준씨가 멘토라면 그런 사람 300명 있다’고 한 안철수씨 발언 말이다. 윤씨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랬다. ‘내가 무당 40년에 반 귀신 아니요.’”

 - 안철수씨가 왜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봤나.(인 목사는 이 대목에서 한참 뜸을 들였다)

 “속이 차지 않지 않았나. 정치를 아무나 하나. 나라를 아무나 다스리나. 대통령 할 만한 사람이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그의 인생이 사람들로 꽉 차 있어야 한다. 그가 상대한 사람들이 누군가. 그의 말은 젊은이들에게 격려는 될지 모르지만 살아온 역사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얼마나 대단한 역사인가. 안씨 정도 나이면 이 땅의 질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경험했어야 한다. 우리의 역사, 크게 두 가지 아닌가. 민주화의 역사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역사. 적어도 정치 지도자라면 삶 자체가 그런 역사 속에서 다져지고 깎이고 물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괜히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 얘기했네….”

 -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맡았을 때 변절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나는 위장 보수, 합리적 보수, 중도 보수에서 합리적 진보라는 평까지 듣는다. 날 뭐라고 부르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인생의 목표는 성경이다. 예수님은 기독교인이 세상의 소금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소금은 미역국에도 들어가고 된장국에도 들어가야 한다. 어디에서든 음식 맛을 내는 게 소금의 목표다. 진보에 가면 맛있는 진보가 되게 하고, 보수에 가면 맛있는 보수가 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인은 진보냐 보수냐, 존재론을 따지지 말고 역할론을 얘기해야 한다.”

 - 그래도 하필 한나라당을 택했나.

 “노무현 대통령 그룹이 또 집권하면 나라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고 봤다. 또 한나라당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집단인데 성희롱, 차떼기 등 부정부패 이미지를 벗고 바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도 얼마든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자리를 탐하지 말고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인 목사는 “세상 사람들은 날 보고 사회운동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정작 내 꿈은 어떻게 하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뤘다”고 했다. 해보니 되더라는 거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지만 매우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는 “갈릴리교회는 전체 헌금 수입의 50%를 반드시 사회 사역에 쓴다”고 밝혔다. 매주 토요일 교인들이 직접 도시락을 싸서 지역 독거노인 160여 명에게 전달하고, 북한 어린이 500명 점심값으로 한 달에 500만원씩 중국을 통해 지원한다. 애경사를 맞은 교인은 의무적으로 50만원씩 내도록 해 베트남에 암송아지를 전달하는 카우뱅크 사업도 벌인다. 일요일 오후 교회 공간을 인도네시아·몽골 등 이주노동자들에게 제공했더니 이들 중 목사가 생겨 귀국한 뒤 자국에서 갈릴리교회를 열기도 했다.

 인 목사는 “퇴직금으로 지리산 자락 개신교 수도원에 도서관을 짓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에 거주 공간도 마련한다. “기독교 영성에 대한 연구도 하고, 전문가들을 초청해 각종 현안에 대한 토론회도 열 생각”이라고 했다. 정치목사의 인생 2막이 지리산에서 펼쳐질 모양새다.

인명진 목사는

·1945년 충남 당진 출생. 대전고·한신대 졸업. 목사, 노동·주화운동가.
·1972~1984년 재야활동가 무대였던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총무.
·1986~2013년 구로 갈릴리교회 목사. 2006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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