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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의 대결|뉴요크·타임즈 편집지휘권 개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보도할만한 가치있는 모든「뉴스」의 보도』를 사시로 하는「뉴요크·타임즈」에도 게재되지않는 「뉴스」가 더러있다. 「아돌프· 오크스」의 가부장적인 영도하에 세계의 대신문으로 자라온 NYT지가 4대째의 계승자에 이르러 사내외에서『60연대의 대결』이라 일컫는 편집지휘권의 혁명적 대개편을 통해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사내소왕국둘을 과감히 정리한것이 바로 그것. 「런던·타임즈」가 오랜 전통을 깨뜨리고 지면을 쇄신했을때, 「뉴요크」의「헤럴드·트리뷴」지가 66년8월 문을 닫았을때 NYT지는 일목요언하게 이것을 소상히 보도했으나 NYT지 사상 최대의 격변을 가져온 『60연대의 대결』은 수명의 인사이동 사고에 그쳤다.
독자가 모르고 있는것으로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도하기위해 하루에 9백46면(65년10월17일, 우리나라 중앙일간지의 6개월 1주 발행분 면수)을 발행하는 「뉴요크·타임즈」지엔 이 대개편이 그런「카테고리」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엄두못낸 선임자>
그러나 이 개편은 「아돌프· 오크스」와 그의 뒤를 이은 사위 「아더·헤이즈·실즈버거」 (무남독녀인 「이피진」 의남편), 또 「실즈버거」를 계승한「오빌·드라이푸즈」( 「설즈버거」 의 장녀 남편) 등 세명의 발행인(사장) 재임중에 단행하지 못했던 혁명이었다.
「아돌프· 오크스」 가 1896년 「헨리· 레이먼드」 로부터 NYT지를 헐값으로 수매했을때 발행부수는 겨우 9천부, 1935년 사위에게 물려줬을땐 40만부, 다시 사위의 사위 「드라이푸즈」를 거쳐 현발행인 「아더·오크스·설즈버거」의 경영하에 일간 90만, 일요판 1백50만부로 성장했다.

<없지못할 필수품>
독일계 유태인 「아돌프· 오크스」가 남부지방의 어느 신문사에서 편집국 청소부로부터 시작하여 NYT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데는 그의 뛰어난 실업가적 수완도 있지만 사회공기로서의 신문의 사명을 한시도 잊지않은데 있었던 것. 유려한 문장력보다 사상의 정확한 보도에 치중하는 이 신문은 이제 NYT지에 보도되지 않는 「뉴스」는 「뉴스」가 아니며 이 지면에 게재되는 것은 틀림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맹신자들과 이 신문을 읽는 것을 필수일과로 삼는 정치인·식자·학생등의 독자를 낳았다. 연간 1억3천4백만「달러」의 비용을 들여 5천3백명이 제작해 내는 NYT지는 미국의 1만1천여 대중소도시에서, 세계의 수도에서,백악관과 정부부처와 국사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없어선 안될 필수품으로 탐독되고 있다.

<맹위떨친 「공국」>
60연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전통과 현대화를 조화시켜야 할 개편에 당면했었다. 부수가 늘고 고용인원이 증가하고 기계화가 촉진됨에따라 편집부문만의 관리도 자꾸만 어려워져 갔다. 그 중에서도 NYT왕국내의 수개 「공국」의 처리가 무엇보다 난제였다.
수개 「공국」이 독자적 존재는 불가침의 전통 일부를 이뤄 「아더·헤이즈·설즈버거」 와 「오빌· 드라이푸즈」의 강력한 지도체제하에서도 억제되긴 커녕 더맹위를 떨치고있다.이것에 과감한 수술을 가한것이 63년에 약관 37세로 발행인 (사장)이된 「아더·오크스·실즈버거」. 그러나 편집지도권이 단일편집인의 수중에 집중되기까진 세상에 알려지지않은 20년간의 투쟁이 있었다.

<빛잃은 기자생활>
35년 장인으로부터 운영권을 이어받은 「아더· 헤이즈· 설즈버거」씨가 건강상 이유로 맏사위「드라이푸즈」에게 사운영을 넘겨줬을 때 그는 70년대, 아니 80연대까지는 NYT를 『통치』해 나갈것으로 예상됐다. 그래서 「아더·헤이즈·설즈버거」의 아들「아더·오크스·설즈버거」(별명 「펀치」)는 NYT의 실력자와 대기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않았다. 「드라이푸즈」의 『통치』가 끝날것이 예상됐던 80연대는 너무나도 먼 앞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NYT의 복도와 사무실에서『왕자』의 귀염을 받았던 그는 단계적인 『기자생활』을 하는동안 공교로운 곡절로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
이런 빛나지 못한 기자생활을 마치고 「펀치」가 1955년 본사에 와서 부친의 보좌원으로 들락날락 했을때 거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또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주요일과 중에는 「터너·캐들지」편집국장실뒤의 작은 「바」에서 「캐들지」씨와 몇잔 마시면서 잡담하는 일이 들어있었다. 이잡담에서 「캐들지」씨의 편집권 집중안에 관한 대목이 빠지지 않았다. 「캐들지」씨는 아버지 「설슨버거」를 대신하여 인생교육을 시작하였고 80년이든 언제이든 어느때 가서는 발행인이 필 「펀치」에게 신문에 관한 지식을불어넣는데도 애썼다.

<취재지시도 묵살>
주요독립공원만도 「워성턴」지국, 일요판부,「사이러스·L·설즈버거」수석특파원하의 「파리」지국, 편집국의 각부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공국등등, 이중에서도 특히 공식적으로는 편집국장 지휘하에 있는 「워싱턴」지국과 일요판부였다. 취재지시는 거의 묵살되고 본사에서 특별취재차 「워싱턴」에 파견되면 영역 침범이라고 협력은 고사하고 취재된 내용이근거없는 것이라고 부인하는 별도기사를 송고하는가 하면 지국장의 동의없이 지국기사를 본사에서 임명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63년 「드라이푸즈」씨가 사망한지 1개월만에 「펀치· 실즈버거」가 사장겸 발행인으로 임명되어 이른바 『60년대의 대결』이라는 편집권의 1인집중화 개편이 단행됐다.
20년동안 이 안을 추진한 「터너·캐들지」씨가 새로 「편집인」이란 직책하에 NYT의 모든 편집권을 그의 수중에 집중시켰다. 『60연대의 대결」 이라고 일컫는 것은 「워싱턴」지국의「제임즈·레스턴」지국장과 일요판부「마켈」씨가 「펀치」- 「캐들리」안에 맞서 반대했기 때문이다.
「캐들지」는 일종의 섭정으로 편집인이 된후 지난 4년동안 「펀치」의 인도를 겸한 긴밀한 협조로 『미국의 양심』이라는 NYT지는 작년 늦게있은 제2차 인사이동,『NYT지의 양심』이라는「레스턴」의 편집인임명과 「캐들지」의 부사장 승격으로 순탄한 항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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