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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어둡고 불안한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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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수야…. 이 거리, 우리가 다 먹어 보자.” “미안하다. 나는 이제 네가 사랑했던 사람과 싸워야겠다.”

 이런 대사, 환한 대낮에 들으면 손발이 사정없이 수축할 법한 문장들이다. 그런데 주말 대낮 ‘다시보기’로 돌려보는 데도 꽤 멋들어지게 들리기에 감탄했다. JTBC가 월·화요일 밤 9시50분에 방송 중인 드라마 ‘무정도시’다. 마약조직을 궤멸시키기 위해 조직에 잠입한 ‘언더커버’ 요원을 주인공으로 경찰조직과 마약조직의 사투, 그 안에서 싹튼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다. 폭력과 어둠의 세계, 뜨거운 의리와 차가운 배신을 담는 속칭 누아르(noir) 드라마다.

 누아르는 인간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극대화한 장르다. 나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지나치게 비정한 세상에서 지나치게 ‘폼을 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화면은 늘상 어둡고, 사람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서로를 배신하고 죽인다. 더구나 희대의 명화 ‘무간도’ 이후 ‘신세계’ 등 다양한 영화에서 변주되어 온 언더커버 스토리가 합류하면 검은 세계의 매력은 한층 강화된다. 적으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나는 누군가, 여긴 또 어딘가’를 고민하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JTBC 월화 드라마 ‘무정도시’의 이재윤·남규리·정경호(왼쪽부터). [사진 JTBC]

 이렇게 보면 그동안 누아르 영화는 많았던 반면, 드라마로는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수위 높은 폭력과 ‘쎈’ 대사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밥을 먹으며, 설거지를 하며, 때로는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며 일상적으로 즐기기에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정도시’의 시도는 위험했지만, 현재까지는 꽤 성공적이다. 탄탄한 줄거리, 안개에 휩싸인 듯 쓸쓸한 화면, 젊은 배우들의 호연이 합쳐져 누아르 특유의 정서를 잘 살려냈다. 특히 폭력조직에 잠입한 언더커버 요원 시현 역을 맡은 정경호의 연기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다. 남성성을 강조하지 않는 섬세하고 절제된 몸짓, 차분한 목소리로 누아르 주인공의 비극적인 아우라를 훌륭하게 표현해 낸다.

 그러니 이 여름, 더위로부터 도피할 공간이 필요한 이들에게 ‘무정도시’의 서늘하고 불안한 세계를 권한다. 5회부터 봐도 10회부터 봐도 바로 내용 파악이 가능한 드라마들과는 다른, 몰입의 쾌감을 주는 작품이다. 단,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갈등구조를 따라가려면 시청 중 한눈을 팔지 말 것. 이렇게 흐트러지기 쉬운 시청자들의 집중력을 그러모아 끝까지 힘 있게 끌어갈 수 있는가가 한국 최초 누아르 드라마 ‘무정도시’에 주어진 어려운 숙제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