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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계 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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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밈 안서리
2001년 9월 12일 타밈 안서리는 샌프란시스코 주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라디오 토크쇼를 듣고 있었다. 바로 전날 발생한 테러공격의 여파로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에서 토크쇼 중 오간 대화는 교양있는 말투가 아닌 험한 욕으로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알카에다 조직과 테러범들을 숨겨주고 있는 탈레반 정부가 소재한 아프간에 보복 폭격을 가해 석기시대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서리는 집에 가서 슬픔에 찬 e-메일을 썼다. 그는 아프간 폭격에 대해 "문제는 아프간은 이미 석기 시대로 돌아가 있다는 것이다. 구소련군이 벌써 아프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썼다.

그는 "아프간인들을 고생시키자고? 그들은 이미 고생하고 있다. 그들의 집들을 부수자고? 이미 부서졌다. 학교를 파편 더미로 만들자고? 이미 그렇다. 병원을 없애버리자고? 이미 없어졌다. 그들의 기반시설을 파괴하자고? 의약품 공급과 치료를 중단하자고? 너무 늦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어떤 이들이 다 해버렸다"고 써내려 갔다.

그는 이 메일을 친구 몇 명에게 보냈다. 그러자 지구 건너 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응답했다. 낯선 사람들이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방송국들이 연락을 해왔다. 엔카르타의 칼럼리스트인 안서리는 깜짝 놀랐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로부터 걸려온 전화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은 아프간이 그렇게 짓밟힌 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한테 '이거 거짓말이죠?'라고 물어왔다"고 말했다.

54세의 안서리는 자기가 아프간에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변인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아프간에서 자라긴 했지만 어머니가 미국인이고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프간의 대변인이 된다는 것을 다소 꺼렸다. 그는 두 문화권 이야기를 '서방의 카불, 동방의 뉴욕'(West of Kabul, East of New York)이란 새 책에 쏟아 부었다.

그는 "난 두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삶을 살면서 그런 주제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서 "역사적인 이번 사건 때문에 나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끈끈한 가족들

첫 번째 세계는 안서리가 가까스로 20세기에 들어섰다고 묘사하고 있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카불이었다. (칸다하르와 마자르-에-샤리프같은 도시들은 삶의 수준이 15세기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인 신부를 데리고 돌아와 가족과 그의 미국 교육비를 지불한 아프간 정부를 깜짝 놀라게 한 대학 교수였다.

안서리의 가족은 카불에 새로 생긴 지구의 주택가에서 살았다. 이곳은 마당 하나에 있는 본채와 9피트(2미터 70센티미터) 벽을 따라 늘어선 건물 몇 개로 구성돼 있었다. 이는 신식화됐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면이 많은, 아프간 가족들의 생활 양식이었다.

안서리 집안도 다른 아프간 가정들처럼 서로 끈끈하게 연결돼 있었다. 사람들은 얘기를 나누고 가르치고 배우며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프간에 대한 묘사에서 종종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따뜻한 면이라고 안서리는 말했다.

그는 "난 내 책이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며 "바로 이게 우리가 살았던 방식이고 지금과 매우 달랐다"고 했다.

안서리가 10대 소년이었을 때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콜로라도주의 학생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워싱턴에 소재한 아프간 대사관에 근무했다. 하지만 아프간 정부가 변화를 겪으면서 그의 아버지는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안서리는 "결국 그는 대가족을 선택했고 카불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안서리와 나머지 가족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반체제 문화의 일부가 됐고 룸메이트들 몇명과 같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집 한채를 같이 썼다. 그리고 프리랜서 작가로서의 삶에 정착하고 유태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됐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들이 세속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누나는 경영학과 교수와 결혼했으며 남부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쳤다. 그의 남동생은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되어 파키스탄으로 이민을 갔다. 그의 어머니는 워싱턴 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아프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불이익을 당하게 된 그의 아버지는 고생을 거듭하다가 1982년에 사망했다.

'낙관주의는 그 자체로 약이 된다'

안서리는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아프간에 돌아오려고 했으나 그가 갈 수 있었던 아프간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은 파키스탄과의 접경 지대였다. 그는 약 석달 전에 아메리카프렌즈봉사단(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과 함께 보급 물자를 배포하기 위해 다시 아프간으로 갔으며 그간 일어난 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난민 수용소 네 군데를 방문했다. 첫 번째 것은 70년대 후반에 세워진 것이었다. "끔찍하긴 했지만 여전히 하나의 마을이었다. 아프간의 관습이 남아 있었으며 애들로 북적댔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새로 생긴 수용소들일수록 더 열악했고 궁핍함은 더 심각했다. 그는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10대 애들이 전형적인 문제의 온상지가 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난민 수용소는 '집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삶의 대부분이 의미가 없다고 그는 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 갓 6개월 밖에 안된 수용소에서 그는 양 부모를 모두 잃고 말라리아에 걸린 꼬마 한 명을 만났다.

안서리는 "그 아이는 나에게 '우리한테 무엇을 줄려고 가져왔어요?'라고 물어왔고 난 담요라고 답했다. 그 때 햇볕이 이미 너무 뜨거웠다. 그 아이는 '전 종이하고 연필을 가져오길 바랬어요'라고 말했다. 슬픈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 탈레반 정권을 몰아낸 아프간 침공은 서방인들이 이 국가를 향한 눈을 뜨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그는 전한다. 또한 그는 "그들은 아프간이 시대에 뒤떨어진 묘지가 아니라 한 때는 구조와 사회를 지니고 있었던 곳이란 점을 깨닫고 있다. 그곳에는 고대 문화가 존재했으며 여전히 존재한다"고 했다.

게다가 그가 비록 아프간이 구소련군이 축출된 이후에 그랬듯이 무정부 상태의 희생물이 될까봐 걱정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상태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보인다"면서 "임시 정부에 대한 협상을 적절하게 한다면 이 임시정부는 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 낙관주의는 그 자체로 약이다"고 말한다.

'서방의 카불, 동방의 뉴욕'에 대한 반응이 또한 안서리를 낙관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책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면서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글을 쓰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나는 아프간에 대해서만 쓰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말한다.

Todd Leopold (CNN) / 김내은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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