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상 욕심과 거꾸로 살라는 학교, 그런데 명문대 진학률은 높네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2면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교복·통제·입시설명회 없는 고등학교. 경남 거창에 있는 거창고등학교다. 학생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해 주고 교사는 학생회가 결정한 사안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거창고의 기본 운영 방침이다.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학생을 가르칠까 싶지만 오히려 진학률은 놀라울 정도로 높다.

지난해 졸업생 114명 가운데 113명이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 27명, KAIST 1명, 교육대학 6명 등 수도권으로 77명, 지방대학엔 36명이 진학(중복 합격 제외)했다. 전교생 360명인 작은 시골 학교에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이 몰리는 이유는 진학률 말고도 또 있었다.

거창고 학생은 축제 기획부터 결산까지 스스로 한다. 축제 장면과 관련 포스터.

봄예술제 3일, 봄소풍 1박2일, 가을예술제, 한나눔터.

 거창고 학생회가 한 해 동안 주관하는 굵직한 행사만 이렇게 네 가지다. 이 외에도 합창제, 이웃돕기 바자회, 학생회장단 직접 선거도 축제처럼 치러진다. 행사는 길어야 3일이면 끝이 나지만 기획 단계부터 운영·결산까지 마치고 나면 행사 하나당 한 달은 족히 쏟아부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회의 결정에 따라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고, 교사는 말 그대로 참관만 한다. 동아리 조직이나 방과후 수업, 특강 프로그램도 학생 건의사항을 우선적으로 반영해 운영한다. 김선봉 교장은 “학교 주인은 학생이고, 시행착오도 교육”이라며 행사에 대한 모든 일을 학생에게 맡기고 있다.

 혹시 이를 시간낭비로 여기는 학생은 없을까. 2학년 위한규 군은 “학교를 내가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이 생겨 학교 모든 일에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거창고 학생의 애교심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많다. 학생들끼리 ‘거창고를 위한 기도회’를 결성해 매주 네 번씩 점심시간에 모여 금식 기도 모임을 갖는 게 대표적이다. 번갈아 가며 학교를 위한 기도 주제를 적어오면 모임에 참여한 모든 학생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거창고의 졸업생 반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졸업생 대부분 항상 낀다고 한다.

신입생 중에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거창고의 독특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도 꽤 있다. 1학년 박주연 양은 “3~4월엔 자율이 아니라 살짝 방종의 모습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숙사 학교라 부모님 감시에서 벗어난 데다 학교 분위기까지 자율적이니 몇몇 친구들은 공부는 안 하고 자유를 만끽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며 “하지만 다들 목표가 분명한 애들이라 금방 제자리를 찾더라”고 했다.

 거창고 학생에게 교사보다 무서운 존재가 선배다. 학생 수가 적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선배 눈 밖에 나면 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혹시 선배의 후배 군기잡기 같은 폭력적 상황도 있을까. 그러나 위군은 “선배가 무서운 이유는 지나치리만큼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배들이 공부도 워낙 잘하는 데다 학교 생활도 최선을 다해 참여하니 그런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배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학교 생활을 즐기는 거창고 학생의 학업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거창고에 지원 가능한 성적은 중학교 내신 3~7%대다. 합격한 학생 성적은 훨씬 높다. 서울 서초중을 졸업한 박주연양은 중학교 내신 0.9%, 서울 충암중 출신 위군은 1.2%였다. 서울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했던 두 학생이지만 거창고 입학 후 내신 관리에 애를 먹고 있다. 위군은 “전국에서 잘하는 학생이 모인 데다 학생수도 적어 조금만 실수해도 8등급 이하로 쭉 밀린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능 모의고사 성적을 놓고 보면 거창고 전교생 70%가 2등급 이내에 든다. 사회적 배려자 전형으로 온 학생 가운데 1~2명이 5등급대가 나오는 수준이다.

 

학부모가 궁금해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학교도 아니고 학생에게 온갖 자율권을 주는 데다 주변에 변변한 학원 하나 없는 시골의 기숙사 학교에서 이처럼 높은 학력을 유지하는 비법이 도대체 뭐냐는 것이다. 유상철 연구부장은 “수업의 내실화와 철저한 자율학습 덕분”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거창고는 유난히 자율학습 시간이 많다. 교과 수업은 4시 50분이면 모두 끝나고 전원 취침 시간인 새벽 1시30분까지 자율학습으로 채워진다. 박양은 “자율학습 시간이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다들 집중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영어와 수학은 자율학습 시간을 이용해 교사에게 일대일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자습실에 ‘질문함’을 비치해둬 자습하다 막히는 문제를 쪽지에 적어 질문함에 넣게 했다. 교사는 이를 수거한 후 질문한 학생을 한 명씩 교무실로 불러 개인지도를 한다.

 학생들은 “사교육 도움은 필요 없다”고 입을 모았다. 박양은 “공부는 어차피 혼자 하는 것이고, 막히는 문제가 있으면 기숙사에서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며 “선생님도 다들 친절해 학원 못 다녀 아쉬울 일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거창고 학생들 실력에 비해 오히려 상위권대 진학률은 낮은 게 아니냐는 지적을 한다. 이에 대해 김 교장은 “거창고의 진학지도 방침은 다른 학교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점수대별로 일류대학 인기학과 커트라인에 맞춘 밀어넣기 식 진학지도는 학생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그 일을 통해 사회에 어떤 헌신을 할 수 있는지 두 가지 기준에 맞춰 진로 지도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거창고의 교육 철학을 담은 ‘직업 선택의 10계명’을 만들어 강당에 걸어두고 학생들에게 수시로 일깨워 준다. 위군은 “학교에 처음 입학해 강당에서 이 10계명을 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며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거나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와 같은 말들을 가슴에 새기며 생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거창고 학생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 출신 2학년 학생이 말하는 학교
거창·서울 출신 모두 성적 우수

Q. 중학교 내신이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도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이다. 왜 거창고를 택했나.

A. 고등학교는 기숙사 있는 학교로 가고 싶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면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하니 학교 분위기가 좋은 곳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창고가 인성 교육을 중시한다는 말을 듣고 선택했다.

Q. 기대만큼 동료나 선후배 관계는 좋은가.

A. 어떤 순간엔 가족보다 더 가깝고 끈끈한 관계라고 느낄 정도다.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경쟁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시험 못 본 친구가 있으면 ‘우리는 내신이 불리해 어차피 정시로 대학 가야 하니 연연하지 말자’며 위로한다. 자사고 아이들은 무섭게 경쟁한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기숙사에서는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선후배에게 정말 의지를 많이 한다. 선배는 후배가 보고 있으니 몸가짐에 더 주의하고, 후배도 선배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다.

Q. 남녀공학에 기숙사 생활까지 하니 이성교제를 많이 할 것 같다.

A. 많진 않지만 있긴 있다. 선생님도 특별히 막지는 않는다. 지난해 서울대 진학한 남자 선배가 올해 3학년 된 여자 선배랑 교제를 했다. 마치 교과서에 나오는 ‘이성교제의 정석’처럼 모범적으로 사귀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조언도 해주면서. 그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이성 친구가 생기면 꼭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Q. 거창고 학생들은 애교심이 남다른 것 같다.

A. 맞다. 한 달에 한번 집에 가는데 하룻밤만 자고 나면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 친구랑 선생님 보고 싶어서 집에 오래 못 있겠다. 서울에서 일반 고등학교 간 친구들에게 거창고 이야기를 하면 정말 부러워한다.

Q. 명문 고교에 경쟁도 없고, 친구·선후배 관계도 좋고, 학교를 사랑한다니. 이게 가능한 얘긴가.

A. 교육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 모두를 존중하고 사랑하자는 분위기다. 선생님이 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일이 없다. 서울대 가라고 부담을 주지도 않는다.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뭔지,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나를 점검하다 보면 점수 1~2점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친구와 대화할 때도 대학 이야기보다 인류와 사회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일이 많다.

Q. 서울에서 온 학생들과 경남 지역 학생 사이에 거리감 같은 건 없나.

A. 그런 건 못 느꼈다. 거창 출신 학생은 지역선발로 들어오니까 일반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보다 성적이 낮을 줄 알았는데 웬걸. 전교 1~20등은 거의 거창 친구들이다. 창원이나 울산에서 온 애들도 정말 공부 잘한다. 서울에서 온 건 자랑할 일도, 부러움 받을 일도 아니다.

Q. 거창고 진학을 희망하는 중학생에게 조언한다면.

A. 자신의 재능을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마음을 가진 후배가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기적으로 자기 공부만 챙기는 학생은 거창고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또 중학교 때부터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도 길러둬야 한다. 간혹 부모님 간섭에서 벗어나 해이해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학생이 있는데, 그런 학생에게 기숙사 생활은 오히려 독이 된다.

신입생 이렇게 뽑아요
"전 과목 내신점수 반영 … 자사고 같은 심층 면접은 없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민주 시민을 양성하자는 게 우리 학교 이념입니다.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은 아무리 성적이 우수해도 거창고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박치용 교무부장의 말이다.

 학생 자질 평가는 자기개발계획서와 교사 추천서로 한다.

 자기개발계획서 평가 문항은 크게 세 가지다. ‘그동안 학습 계획을 세우고 평가해온 자신의 학습 과정을 서술하고 이를 통해 느낀 점을 작성한 뒤 고등학교 입학 후 학습 계획·고교 졸업 후 진로 계획에 대해 기술하시오’가 첫 번째다. 자기주도 학습 능력 평가다. 두 번째는 ‘자신이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은 2권을 선정해 내용과 느낀 점을 기술하라’로, 독서 능력과 사고력을 판별한다. 마지막은 ‘중학교 활동 실적 가운데 배려·나눔·협력·존중·갈등관리·관계지향성·규칙 준수와 관련된 사항 두 가지를 적고 이를 통해 배운 점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시오’다. 인성 평가다.

 물론 중학교 내신 성적도 본다. 자기주도학습 전형을 통해 정원의 80%를 선발하는데, 평가항목은 내신 270점, 면접 30점이다. 내신점수는 거창고만의 산출 방법이 따로 있다. 일단 전 과목 점수를 모두 반영한다. 국어·영어·수학은 6단위, 사회·과학 3단위, 도덕·기술가정은 1단위로 계산한다. 음악·미술·체육은 학기별로 한 과목 성적씩만 1단위로 반영한다. 과목별 환산 점수를 내는 방법은 (100-과목별 석차 백분율)X단위 수÷100으로 계산하면 된다. 내신 점수는 2학년 1학기부터 3학년 2학기 성적까지 합산한다. 2학년 성적은 학기별로 2를 곱하고, 3학년 두 학기 성적에는 3을 곱해 모두 더한다.

 면접에서는 서류 내용을 확인하는 가벼운 질문을 한다. 박 교무부장은 “자율형 사립고나 외국어고, 과학고와 같은 심층 면접이 아니다”고 말했다. 면접으로 당락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면접 때 자주 묻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다. 사교육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할 수 있는지와 거창고 교육 철학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다. 박 교무부장은 “우리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창고에 합격하면 학원에 다닐 수도 없고 기숙사에서 모든 일을 혼자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의존적 성향의 학생은 선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선봉 교장은 “거창고는 학생을 일류대 인기학과에 보내는 걸 목표로 하지 않는다”며 “학교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사회에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가진 학생을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거창고 교과내신 성적 산출 공식

① 과목 석차 백분율=(중간석차÷총인원)X100

*중간석차=석차+(동석차자 수-1)÷2

② 과목별 환산 점수=(100-과목별 석차 백분율)X단위 수÷100

③ 교과 내신 산출총점(270점)=2X(2학년 1학기 과목별 환산점수의 합+2학년 2학기 과목별 환산 점수의 합)+3X(3학년 1학기 과목별 환산점수의 합+3학년 2학기 과목별 환산점수의 합)

*소수점 이하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한다.

글=박형수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