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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고·야간대 출신 변협회장 … "법조계 유리 천장 깨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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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위철환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서울대, 서울변호사회, 전관 변호사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느끼는 벽은 아직 없었다”며 “보통 변호사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정책들을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그가 대한변호사협회장이 되겠다고 하자 모두가 혀를 찼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등 부정적 전망 일색이었다.

 경쟁 후보들은 서울대 법대를 나온 뒤 판검사를 거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반면에 그는 지방변호사회 출신에 비(非)서울대, 비(非)전관이었다. 스펙 면에서 열세였다.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하자 가까운 사람들도 손사래를 쳤다.

 혀 차는 소리를 ‘갈채’ 삼아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 지 45일 만인 지난 1월 21일.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결선투표에서 700여 표차로 상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회원 수가 700명에 불과한 경기지방변호사회장에서 일약 1만2000여 명의 전국 변호사를 대표하는 자리에 섰다. 서울대를 나오지 않고 판검사를 거치지 않은 지방변호사회 출신 첫 회장이다. 지난달 27일 위철환(55·사법연수원 18기) 47대 대한변협 회장을 만나 취임 100일(지난 4일)을 맞는 소회를 들어봤다.

신문 돌리며 주경야독

 “내 삶은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학력 때문에, 경력 때문에, 재력 때문에 ‘나는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을 깨려고 부단히 애썼다.” (위 회장)

 실제로 그의 과거는 지금과는 궤도가 많이 달랐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했다. 지역 최고 명문인 광주제일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면서였다. 신문 배급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생활하다 서울 중동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이후 2년제였던 서울교대에 들어가 1979년부터 서울 성북구 정릉 3동의 청덕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교편을 잡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낸 시간들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교사 생활 첫해에 한 제자의 아버지를 만나면서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석 한 번 없던 우리 반 학생이 어느 날부터 장기결석을 한 겁니다. 아버님을 모셔오라고 했죠.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그분은 악덕 업체를 만나 소송에 휘말렸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도 못할 정도로 집안이 거덜 났던 거예요. 들어 보니 억울한 일 투성이였는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무력한가 싶었죠. 그때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중엔 돈이 없었다. 일하면서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대 법대 야간부에 편입했다. 이때부터 낮엔 교사로서 수업하고 밤엔 야간 대학생으로서 수강을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하숙방은 초등학교 앞에 얻고 시간을 쪼개야 생활이 가능했다.

 일터로 나가기 전 두 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오전 8시반까지 출근했다.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엔 어김없이 대학 강의실로 향했다. 집에 와선 두 시간 정도 복습하다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이런 노력 덕에 대학 졸업 후 1차 시험에 붙었고, 이듬해인 1986년 사법시험 28회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위 회장은 “그나마 토요일과 일요일 여유시간이 많고 방학이 있었던 덕분에 다른 사람의 공부 양을 따라갈 수 있었다”며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의 절대량이 부족했던 만큼 집중력 있게 공부하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했다.

한 번 볼 서류도 두세 번씩 검토

 위 회장은 사법연수원에서 2년을 배운 뒤 31세 때인 1989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20대 중반에 변호사 자격을 얻은 동기들도 있어서 고령자 축에 들었다.

 서울에 있는 유명 로펌에 들어가거나 판검사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를 따라 연고도 없는 수원에서 단독으로 개업했다. 경험이 일천한 새내기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겠다는 의뢰인은 거의 없었다. 수모도 당했다. 잘 아는 학교 선배가 사건을 주겠다며 의뢰인을 소개해 줬지만 건물 입구에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가버렸다. 경험 많은 다른 변호사 사무실에 더 많은 수임료를 주고 사건을 맡긴 걸 나중에 들어서 알았다. 그는 “좌충우돌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정말 막막했습니다. 소송이란 게 패소하면 자기 재산 또는 자기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잖아요. 제가 의뢰인이라도 저한테 사건 맡기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재판부가 보기에도 한심해 보였겠죠.”

 하지만 그는 견뎠다. 몇 달간 단 한 건의 사건을 수임하면서도 버텼다. 적어도 한 번 사무실에 왔다 간 의뢰인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변론했다. 한 번 들여다볼 서류를 두세 번씩 검토해 가며 변호사의 생존법칙을 익혀 나갔다. 한 번 거쳐간 의뢰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를 추천해 주면서 고정적으로 찾는 의뢰인이 생기는 선순환 궤도에 접어들었다. 위 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해 주는 분들이 생겨 밥은 먹고살 수 있었다”며 “전관 변호사를 선호하는 의뢰인들의 편견을 깨는 방식을 몸으로 알아가던 시기”라고 말했다.

"모래알 같은 조직 바꾸고 싶었다”

 20여 년간을 수원 인근에서 변호사로 활동한 위 회장은 2009년 경기지방변호사회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변호사 회장 하면 천편일률적으로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현직에서 화려한 경력을 거친 이들이 변호사 개업 후 자연스럽게 회장까지 하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변호사들이 개별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똑똑한 분들이에요. 전국 1등 정도는 한 번씩 해본 사람들이 수두룩하죠. 하지만 단체성은 별로 없어요. 의견을 하나로 모아 시너지 효과를 내면 좋겠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 게 아쉬웠어요. 살펴보니 변호사 회장님들 대부분이 화려한 공직 경험을 거치신 분들이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변호사는 그런 경력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보통 변호사들의 마음을 잘 아는 회장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전했습니다.”

 말리는 사람이 99%였다. 나이도 그렇고, 경력도 그렇고 이전까지의 회장 후보와는 판이하게 다른 이질적인 그의 등장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후보로 나섰던 경쟁자들이 모두 그에게 얼른 포기하고 후보 단일화를 하자고 종용했단다. 하지만 두 달여 선거 기간을 통해 그는 ‘보통 변호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67%의 지지율로 경기지방변호사회 회장에 당선됐다. 위 회장은 “결선투표까지 가지도 못하고 떨어질 거라 예상했는데 1차 투표에서 과반 이상을 득표해 당선했다”고 말했다. 그는 연임에도 성공해 지난해까지 4년간 경기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일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변협 회장 도전 의지를 굳혔다. 이번에도 역시 모두들 만류했다. 전체 대한변협 회원 1만2000명 중 9000여 명이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원인데 지방 출신이 어떻게 당선되겠느냐는 우려였다. “혼자 착각하고 있다”는 등 모욕적인 비아냥거림도 쏟아졌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실패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탱했다.

 “가장 친한 선배가 저를 붙들고 대한변협 회장 자리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4학년 때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을 통과한 사람들 중에서 되는 거라고 얘기할 때 정말 화가 났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속에 유리 천장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회원들 위해 ‘소통용 e메일’ 만들어

 위 회장은 지난 2월 취임 이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정책을 결정하거나 의견을 모을 때 불협화음 같은 건 없다고 단언했다.

 “최대한 다양한 사람을 만납니다. 국내 16개 로펌 대표들과 간담회를 했고, 사법연수원 31기에서 42기, 로스쿨 1·2기 각 기수 대표들과 식사도 했습니다. 저한테 직접 얘기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소통용 e메일’ 주소를 따로 만들어 전 회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개인변호사였다고 그쪽만 유리하게 정책을 만들 일은 절대 없습니다. 로펌이 잘돼야 젊은 변호사 고용 창출도 잘되고 전체적으로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협의를 통해 균형점을 찾아나갈 겁니다.”

 2년여간의 임기 중 민사사건에서 필요적 변호사 변론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다. 위 회장은 “7월에 세미나를 열고 임기 중에 실현할 계획”이라며 “공익적 활동 차원에서 청년 변호사를 활용하자는 취지도 있다”고 설명했다.

 로스쿨에 들어가지 않고도 변호사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제도 마련도 고민거리다. 돈이 없어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의 사다리를 만들자는 차원에서다.

 “저도 사시 제도가 없었다면 변호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로스쿨 제도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제도를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굳이 사법시험이 아니더라도 일하면서 로스쿨을 다닐 수 있게 야간 로스쿨을 만드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변호사가 되지 못했다는 ‘유리 천장’을 가만히 둘 수는 없죠.”

글=박민제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위철환 회장=전남 장흥이 고향. 1979년 서울교대를 졸업한 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성균관대 법대 야간학부에 편입했다. 84년 법대를 졸업한 뒤 86년 사시에 합격했다. 89년 수원에서 개인변호사로 개업해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경기지방변호사회 회장에 당선됐고, 한 번의 연임을 거쳐 4년간 일했다. 지난 2월 47대 대한변협 회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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