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반정부 시위 전국으로 번지자 주민투표 카드 꺼낸 에르도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무스타파 케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10년 집권 최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12일(현지시간) 주민투표 카드를 꺼내들었다. 13일째 이어지고 있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를 수습하기 위해서다. 이번 사태에 강경책으로 일관해온 에르도안이 처음으로 선보인 유화책이라 주목된다. 터키 정부는 지난달 31일 이스탄불 탁심광장 인근 게지공원의 연좌시위에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한 경찰의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면서 시위는 터키 전역으로 번졌다.

13일(현지시간) 터키 경찰이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터키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기념비를 에워싼 채 경비를 서고 있다. 터키 정부는 전날 게지공원 재개발 주민투표를 제안했다. [이스탄불 AP=뉴시스]

 12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집권 정의개발당(AKP)의 후세인 셀릭 부의장은 “정부와 협의해 게지공원 재개발 시행 여부를 이스탄불 시민에게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투표를 해도 지진으로 붕괴 위험이 있는 아타튀르크 문화센터의 해체는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시위대는 그동안 게지공원 재개발 계획 백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왔다. 아타튀르크 문화센터 유지는 핵심 요구사항 중 하나다. 이곳은 오스만제국 말기 터키 공화국을 건설해 ‘국부(아타튀르크)’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을 기념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재개발 계획은 이슬람교를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세속주의를 표방한 아타튀르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샀다.

 AKP의 발표는 이날 오후 에르도안 총리가 수도 앙카라 집무실에서 학생·배우·건축가 등 시민 대표 11명과 면담한 직후 나왔다. 총리는 면담 후 AKP 관련 행사에 참석해 “24시간 이내에 사태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이 면담한 대표단에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 온 탁심연대 등은 참여하지 않았다. 탁심연대 측은 “총리와 만난 11명이 시위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시위대가 총리가 제안한 주민투표를 수용할 가능성은 작다는 분석이다.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터키 사태에 잇따라 우려를 표명한 가운데 나온 총리의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에르도안이 주민투표 제안 다음날인 13일 시위대에 “인내심이 바닥 나고 있다. 게지공원에서 나갈 마지막 기회”라고 엄포를 놓은 것도 제안의 진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주민투표가 실시될 경우 에르도안에겐 정치적 도박이 될 수 있다. 총리의 지지층은 탄탄하지만 게지공원 재개발 여론은 반반으로 나뉜다. 주민투표에서 재개발 반대 결과가 나올 경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12일 이스탄불에선 변호사 2000명이 검은 법복을 입고 거리로 나와 법조인 연행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번 시위로 현재까지 경찰 1명 포함, 4명이 죽고 5000명이 다쳤다.

전영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