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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60주년 … NARA 사진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③ 일제강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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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 NARA의 문서상자 속엔 한국인 ‘성노예’(일본에서 사용되는 ‘위안부’란 표기는 일본군 입장에서 쓰였음) 20명에 대한 포로 심문 기록이 들어 있다. 돈을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끌려와 강제로 성노예가 되었던 사실이 적혀 있다. NARA에 소장된 성노예 관련 사진도 그들의 고통을 증언한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한국인 여성들의 최후로 추정되는 사진도 전한다. 최근 일본유신회 공동대표이자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동원되었던 사실을 부인하고 전쟁 때 위안부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망언까지 일삼는 상황이어서 주목된다.


식민지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예속된 삶을 의미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은 은메달을 딴 영국의 하퍼처럼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시상대에 올라 주최국 독일의 히틀러 총통이 월계관을 씌워줄 때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상대를 내려올 때도 손기정과 남승룡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일본의 국가대표로서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이들이다. 당시 일본 방송은 이들의 승리를 ‘조국 일본’의 영광으로 돌렸다.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제재조치는 식민지시대 조국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일제는 한국을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일본의 법률과 제도를 한국에 형식적으로 도입하면서 한국인을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 만드는 교육을 실시했다. 서울 도심에는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모던 보이’ ‘모던 걸’ 같은 새로운 인간 군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베를린올림픽 메달 따고도 굳은 표정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 식민 지배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억압과 차별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제국주의 영국·프랑스와 비교해도 훨씬 가혹했다. 일제는 한국인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약한 것은 물론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까지 강요해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강제병합과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발전하지 않고 정체돼 있었다는 식민사관까지 가공해냈다.

 일제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저항은 다양하게 전개됐다. 신학문을 배우고 산업을 진흥시켜 실력을 길러야 독립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부터 총칼을 들고 무장항쟁의 대열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식과 사상이 공존했다.

윤봉길·이봉창, 중국·일본서 폭탄 던져

 NARA에는 독립운동가 윤봉길과 이봉창의 거사 관련 사진도 소장돼 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던 이봉창,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축하 기념식장이었던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 이들의 ‘저항 폭력’은 일제의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식민지인의 열망을 대변했다.

 ◆성노예냐 위안부냐=‘위안부(慰安婦)’라는 용어는 ‘전쟁에 지친 병사들에게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을 뜻하며 ‘종군(從軍) 위안부’라는 용어와 혼용돼 왔다. 여성들이 전쟁터의 군인들을 따라다니며 ‘위안’을 했다는 뜻이 된다. 성적 학대의 강제성과 인권 유린의 범죄성을 은폐한 용어다.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는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를 공식 용어로 채택했고, 이후 성노예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배영대 기자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약칭. 미국 역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존·제공하는 독립기관이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 관련 사진 10만여 장을 소장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01년부터 국외 소재 한국사 자료를 수집해왔다. 이번 시리즈에 실리는 해방 이후의 사진은 대부분 주한미군에 배속됐던 미육군통신대(Signal Corps) 사진부대(Photo Detachment)에서 찍은 것이다.

◆ 사진설명

1 포로가 된 한국인 위안부들. 사진 원본에 ‘1944년 8월 14일, 미군 G-2 정보부대 기동대원들이 미치나(Myitkyina?미얀마 카친주) 인근에서 붙잡힌 한국인 위안부(Korean Comfort Girls)를 심문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2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거 현장. 사진에 다음의 설명이 붙어 있다. ‘32세 조선인 노동자 이봉창(RiHosho)은 히로히토 일왕이 탄 마차 앞에 있던 궁내대신 키토쿠로 이치키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히로히토 일왕은 신년 육군관병식에 참석하고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3 일본군에 의한 한국인 여성 학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원본의 설명이 많이 훼손됐다. 부분적으로 ‘학살된 여성들’ ‘일본군’ 등이 영어로 인쇄됐던 걸 확인할 수 있다. 인쇄된 글자와 별도로 색연필로 ‘사상자들-한국인(Casualties-Korean)’이라고 흘겨 쓴 글씨도 남아 있다.

4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 시상식장을 걸어나오는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있다. 사진 원본에는 특별한 설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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