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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관련 유령회사 미스터리 … 감시 심한 미국 코앞에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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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본주의 지하경제 상징인 조세피난처에서 북한 흔적이 발견됐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 취재한 인터넷 매체인 뉴스타파는 대표적인 조세피난처에 “북한 관련 페이퍼컴퍼니(서류에만 존재하는 회사)들을 찾아냈다”고 6일 발표했다. ‘천리마’ ‘조선’ ‘고려텔레콤’ 등이다. 세 곳 등기이사 명단엔 ‘임종주(Lim Jong Ju)’란 이름이 공통으로 들어있다. 뉴스타파는 “임씨는 북한 국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 이동통신 사업에 참여한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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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파는 “‘래리바더솔루션’이란 곳도 북한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회사 이름은 영어식이지만 등기이사인 문광남의 주소가 평양시 모란봉구역으로 돼 있어서다. 이런저런 정황에 비춰 페이퍼컴퍼니 네 곳 모두 북한과 직간접적인 커넥션이 엿보인다.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는 기업과 범죄집단의 탈세·돈세탁 등과 관련이 깊다. 뉴스타파가 최근 잇따라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기업과 개인 명단을 공개한 이유다. 그런데 돌연 북한 관련 페이퍼컴퍼니가 드러났다.

 그 회사들은 모두 2000~2004년 사이에 설립됐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살아있을 때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절대 지존이었다. 세금을 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물리는 위치였다. 이런 김 전 위원장이 탈세 목적으로 그 회사들을 설립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 회사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히틀러 채널(Hitler’s Channel)’을 떠올린다. 이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 봉쇄를 뚫고 전략물자를 수입하기 위해 스위스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들이다. 터무니없는 추정은 아니다. 버진아일랜드는 베네수엘라산 원유 등 북한이 갈급해 하는 자원들이 충분한 중남미와 아주 가깝다. 또 최고급 시가와 커피 등 김정일·김정은이 즐길 만한 사치품을 생산하는 쿠바 등과도 지척이다.

 문제는 미국의 감시다. 버진아일랜드는 미국의 코밑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브해에 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재무부, 국세청, 중앙은행 등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곳이다. 미국의 감시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더욱 심해졌다. “그런데도 북한이 자신들과 연관성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조선이나 고려 등의 이름으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을지 의문이다.” 통일부 한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 페이퍼컴퍼니들이 재일동포 등이 설립한 회사들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다. 실제 적잖은 재일동포가 평양 등에 주소를 두고 있다. 이들이 사업상 필요에 따라 조세피난처를 이용할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바로 페이퍼컴퍼니들이 북한의 ‘정상적인’ 대외 거래 창구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서방 기업들과 합작을 활발히 추진했다. 하지만 서방 비즈니스맨들이 북한과 거래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싫어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북한이 페이퍼컴퍼니를 내세워 합작을 추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문제의 회사들이 북한 대외 일꾼 등의 딴 주머니일 수도 있다. 외화벌이 목적으로 해외에 파견된 인물이 북한 정부나 당에 송금하지 않은 돈을 저장 해 놓은 곳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들이 이곳 자금을 이용해 북한 노동당과 정부 실력자들에게 뇌물을 살포했을 것이란 시나리오다. 실제 그렇다면 앞으로 북한 내부에 숙청 바람이 불 수도 있다. 이날 공개로 북한에서도 ‘조세피난처 스캔들’이 터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히틀러 채널(Hitler’s Channel)=아돌프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전략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스위스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들. 영국 더타임스 기자인 애덤 르보르가 저서 『히틀러의 비밀 은행가들 』에서 처음 쓴 말이다. 2차대전 당시 중립국인 스위스는 연합국이나 독일 양쪽과 활발히 거래했다. 특히 다보스는 연합국과 독일의 정보원과 비즈니스맨들의 허브였다. 히틀러는 이곳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연합국이 수입을 막은 텅스텐과 주석 등 광물을 아프리카 등에서 조달했다. 2차대전 직후 히틀러 채널은 나치 전범들이 연합국 감시망을 피해 개인 재산을 빼돌리는 창구로도 구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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