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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반정부 시위 복병 … 고비 맞은 오스만 제국의 부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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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터키 반정부 시위대가 1일(현지시간) 총리 집무실이 있는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 근처에서 굴착기를 이용해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다. [이스탄불 AP=뉴시스]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터키의 야심이 내정불안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4일(현지시간)로 닷새째를 맞은 반정부 시위가 터키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스탄불의 게지 공원 재개발을 반대하는 집회로 촉발된 이번 시위는 3선 총리로 10년 넘게 집권 중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를 정조준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경찰의 과잉 진압에 반발한 민심이 에르도안 총리에게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독선적”이라는 화살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시위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에르도안 정부는 10년간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정치·사회 개혁에 힘입어 거칠 것 없는 질주를 해왔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지난달 16일 터키의 국채 신용등급을 Baa3로 상향 조정했다. 터키가 투자적격 등급을 받은 것은 20년 만이다. 오랜 지역 라이벌인 그리스에 비해 무려 11단계나 높은 것이다. 2003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온건 이슬람 성향의 정의개발당(AKP) 정권이 들어선 이후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00%에서 30%대로 떨어졌다. 유럽의 재정위기 와중에서도 지난 10년간 평균 7.3%의 높은 성장률을 보여왔다. 천정부지로 올랐던 인플레도 거의 잡혔다. 1961~200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온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에르도안 집권 뒤 인플레 잡고 IMF 졸업

에르도안

 런던의 코메르츠방크 신흥시장 연구 책임자 사이먼 쿠이자노 에번스는 “신용평가사들이 결국에는 에르도안 정부의 경제부흥과 정치적 안정을 인정한 결과”라고 말했다. 터키는 지난달 IMF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아 52년 채무국 역사에서 벗어나는 겹경사를 누렸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4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정면충돌해 왔던 남부 쿠르드족과의 휴전에 따라 정부군과 무장투쟁을 벌여왔던 반군도 지난달 8일 철수를 시작해 투자 여건은 더욱 호전되고 있다.

 오스만튀르크는 1923년 해체되기 전까지 거의 600년 동안 대제국을 형성하며 번영을 구가했다. 최대 영토를 가졌던 17세기 말엔 동쪽으로 카스피해, 서쪽으로 지브롤터 해협, 남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빈 인근까지 뻗쳤다.

 아흐메트 다부토을루 터키 외무장관은 지난 3월 남동부 쿠르드 도시 디야르바키르를 방문해 신오스만주의의 부활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산물인 쿠르드족의 분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100년 전으로 시계를 돌리자”고 제안했다. 그는 서방국가들이 만든 중동의 민족주의적 분열을 거부하고 다시 대통합으로 나아가자고 역설했다. 다부토을루 장관과 에르도안 총리는 신오스만주의의 대표적인 신봉자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터키는 에르도안 집권 후 유럽에서 눈을 돌려 주변 아랍국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웃 나라와는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는 외교정책을 내세워 중동을 다시 껴안으며 제국의 해체와 더불어 잃어버린 지역 리더십 역할을 되찾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란·시리아와도 손잡아 중동 리더로

 터키 외무장관들은 2002년 11월~2009년 4월 이란과 시리아만 적어도 8번 방문하며 관계를 다졌다. 2005년에는 미국의 강한 반대를 뿌리치고 아흐메트 세제르 당시 터키 대통령이 시리아를 찾아갔다. 이후 터키는 시리아에 대한 비자 제한을 풀고 두 나라 합동 각료회의도 열었다.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던 이스라엘과는 대립각을 세워 아랍 국가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최근에는 터키가 이라크 쿠르드자치주 당국을 상대로 직접 석유와 가스 구매 협상에 나서 주변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쿠르드족을 이라크에서 떼어내 터키경제권에 묶으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의 장기화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서 미국 다음으로 잘 무장된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불안정한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든든한 안보 파트너로 확고한 자리를 잡은 터키는 10만 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이스탄불 경제외교정책연구센터(EDAM)의 시난 울겐 소장은 “터키가 글로벌 야망을 가진 지역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국내 정치상황이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쪽은 에르도안의 이슬람정권에 거부감이 강한 세속주의 세력이다. 최근 주류 판매 제한 강화와 이스탄불 제3대교 건설을 밀어붙이는 에르도안 총리를 비민주주의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비난한다. 세속주의자들의 우상인 터키 국부 무스타파 케말을 따라잡으려는 에르도안의 야심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이 같은 내부 장애물은 만만찮은 외부 도전에 대한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쿠르드족과의 평화안도 아직은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에르도안 총리가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내년 대선 국면에서 폭발성 강한 이슈가 될 수 있다. 시리아 내전이 2년째 이어지면서 수니파가 절대다수인 터키의 영향력은 시아파가 장악하고 있는 시리아와 이란·이라크 등에서는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이라크 누리 알말리키 총리 정부도 자국 쿠르드에 접근하고 있는 터키에 무역 루트를 봉쇄하는 등 견제에 나서고 있다. 기존 중동 강국인 사우디·이란·이집트의 견제도 갈수록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슬람 정책 강화에 세속주의자 반발

 이런 외부 도전에 적극 대응해야 하는 에르도안 총리로서는 반정부 시위라는 복병에 전력을 분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스탄불대 메흐메트 아틀란(정치학) 교수의 말대로 “불안정한 정치환경이 터키 경제를 흔들 경우” 지난 10년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도로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에르도안 총리가 이 위기를 어떻게 수습할지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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