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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글로벌 아이

한·중 정상, 문·사·철로 통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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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지난주 이임식을 치른 이규형 전 주중대사가 자작 시집을 냈다. 재임 시절 직무와 일상 언저리에서 떠오른 단상을 시 형식에 담은 글이다.

 서문은 리자오싱(李肇星) 전 중국 외교부장이 썼다. 서문 끝자락 리 전 부장의 현 직함이 눈길을 끌었다. 퇴임 후 중국 번역가협회를 이끌고 있었다. 37년 외교관 생활을 접고 은퇴한 뒤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두 편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서문에서 리자오싱은 시인으로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서로 다른 국가와 민족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포부와 감정을 표현하는 시는 좋은 소통 수단이다.”

 정치를 내려놓은 뒤 문화계로 옮겨가는 현상은 중국의 당·정·군 고위 인사들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8대 혁명원로 가운데 한 명이었던 펑전(彭眞)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공직 첫 상관이었던 겅뱌오(耿<98C6>) 전 당군사위원회 비서장. 이들은 퇴임 후 문화를 앞세워 공공외교를 지원하는 ‘국제문화전파중심’의 수장을 맡았다.

 다년간 주중 경력을 쌓은 고위 외교관이 “중국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치인이 아닌 문(文)·사(史)·철(哲)을 추구하는 교양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흡사 송나라 때 서예가이자 시인, 화가였던 왕안석·소동파 같은 문인 정치가들처럼 말이다. 중국의 왕조시대엔 무인들도 시와 서예에 능했던 지식인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란 것을 문·사·철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행위로 봤다. 정치를 내려놓은 뒤엔 서재로 물러나 다시 문·사·철의 세계로 돌아갔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였던 화궈펑(華國鋒)은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밀려난 뒤 서예의 세계로 침잠했다. 전통 음악과 미술, 서예에 조예가 깊다는 평가를 받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도 개인 시간 대부분을 문학을 읽고, 서예에 쓴다고 한다. 시진핑도 서예는 물론 톨스토이를 애독하는 문학 애호가로 알려졌다. 지도자 간 대화 속에 인문적 소양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위 지도자의 서예 필치가 대중에 노출이라도 되면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인터넷 게시판이 뜨거워지는 게 중국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은 격동의 한반도 정세 속에서 치러진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북핵, 탈북자 북송, 한·중 FTA 등 당장 공조가 필요한 사안이 회담 테이블에 가득하다. 하지만 한·중 정상의 만남은 한·미 정상의 그것과 접근법이 달라야 한다. 마음은 급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문·사·철이 통하는 대화로 중국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인문 소양으로 평가받는 중국의 정치문화를 공략하지 못하면 화학적으로 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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