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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해외칼럼

미국은 도대체 어디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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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은 미국을 ‘꼭 있어야 할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미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거의 전부가 부정적인 것이다. 하나의 위기가 지나가면 또 하나의 위기가 닥쳐오는데 미국의 지도력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 그것이다. 이는 시리아에서 특히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눈앞에서 형성되고 있는 ‘미국 이후의 세계’가 지닌 특징은 정치적 불확실성, 불안정성, 심지어 혼돈이다. 이제 미국은 과거처럼 세계의 질서를 유지할 의사도, 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중동 지역에서 10년 동안 벌어진 전쟁의 막대한 비용과 인명피해, 재정 및 경제 위기, 막대한 공공부채, 국내 문제 위주의 방향 전환, (유럽이 아닌) 태평양 연안 국가에 대한 새로운 집중 등이다. 여기에는 중국을 비롯한 여러 신흥 대국의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인 쇠퇴가 추가된다.

 중동에서 과거 프랑스와 영국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질서는 최근의 동요로 인해 붕괴될 수 있다.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국경이 의문시되고 있으며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이 지역의 재편 가능성은 시리아에서 보듯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 게다가 미국의 뒤를 이어 지역 헤게모니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이란, 터키, 사우아라비아를 포함해 어느 나라도 자국에 유리하게 사태를 결정지을 힘은 없다. 가까운 장래에 새로운 힘은 나타날 것 같지 않으며 과거의 힘은 행동을 꺼리고 있다. 폭력적 대결이 발생해 장기간 지속될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설사 미국이 또다시 군사 개입을 시도한다 할지라도 자국의 의지를 강제할 만한 힘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미국의 힘이 건재할 뿐만 아니라 개입의 폭이 커졌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핵보유국(중국,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북한)과 핵보유 근접국(일본과 한국)은 모두 위험한 전략적 라이벌 관계로 얽혀 있다. 게다가 북한이 정기적으로 비합리적 도발을 일삼고 있다.

 이 지역에서 불확실성은 크게 확대되고 있다. 중국은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대신 이웃의 크고 작은 국가들과 화해와 협력을 추구할 만큼 현명할까?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의 민족주의 편향과 그 위험한 경제정책은 이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도와 중국은 상호 관계 악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파키스탄에 국가기능 마비 사태가 다가오고 있는가?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힘이 없다는 전제하에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라. 아시아 지역은 정말 더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은 새로운 세계적 역할을 맡을 때 국익의 우선순위를 좀 더 세심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자원이 제한돼 있으니 그렇다. 이때 미국의 계산에서 아·태 지역이 우선순위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유럽에 있는 미국의 맹방들은 이와 관련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도움 없이 자국을 방위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이 나토 동맹국에 대한 안전보장을 포기할 리는 없지만 방위 의무를 100% 이행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 이후의 세계는 새롭고 안정적인 질서가 출현하기보다는 혼란에 빠질 위험이 크며 이는 특히 유럽에 위험 요인이 된다. 유럽은 현재 스스로를 해체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같은 사태를 감안하면 거꾸로 결속을 공고히 해야 할지 모른다. ⓒProject Syndicate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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