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가족 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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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호 31면

“살기 위해 일하라. 일하기 위해 살지 말라.”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이다. 물론 난 내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직장 내 실적의 중요성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따질 때 일은 나에게 1번이 아닌 2번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인 친구와 함께 최근 이런 주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내게 한 말은 흥미롭고도 대조적이었다. “콜린, 우리 한국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건 맞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가족이란 정말 중요해. 서양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서 가족의 중요성은 더 클 거야.” 모든 한국인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고민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

 한국인들이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매우 강하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2090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 영국인들은 OECD 평균보다 적은 시간을 일하지만 생산성은 높다. 한국인 동료들이 매일 법정 근무시간보다 더 오래 책상에 앉아 일하는 것을 보면서 이 통계치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 직장인의 27%가 야근을 하는데, 이는 OECD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주한 영국대사관은 모든 직원이 열심히 일하도록 독려하지만, 동시에 빨리 퇴근해 가족 및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장려한다.

 한국에선 상사가 퇴근하기 전엔 부하 직원이 퇴근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매우 놀랐다. 그래서 난 우리 팀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제시간에 퇴근한다. 일한 시간이 아니라 일의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봤을 때 한국은 OECD 평균 이하였다.

 한국인들이 장시간 근무하는 만큼 개인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과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희생된다. OECD 통계상 한국인들의 개인적 여가 시간은 다른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현실적으론 한국인들이 가족과의 시간을 갖는 건 굉장히 어려워 보인다. 한국에서 가족이라는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내 친구의 주장에 반대하진 않는다. 한국 사회가 어른을 공경하고 가족이라는 단위를 만드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건 배울 만한 점이다.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꼭 듣는 질문이 “결혼하셨어요?”다. 한국인들이 가족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가족과 좋은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있을까? 끊임없는 야근, 부족한 사회복지제도, 그리고 엄청난 양육비로 인해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부분 자신들의 부모님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주말뿐이라고 한다. 난 아직 아이가 없지만 이런 상황이 얼마나 힘들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국은 부모들이 직장 생활을 잘하면서 동시에 가정을 잘 꾸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 여성들은 최소 52주의 출산휴가를 법적으로 보장받으며 그중 39주는 유급휴가다. 2015년부터는 아빠와 엄마가 각각 휴가를 나눠 쓸 수 있게 되어 부모가 모두 육아를 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의 육아 관련 제도는 이에 비해 부족하다고 들었다. 또 다른 한국인 친구는 내게 육아 문제로 인해 좋은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한국의 젊은 부모들이 개인적 삶과 커리어의 발전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더 많은 노력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내 친구들을 포함해 모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한 높은 사명감에 박수를 보낸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하는 힘든 결정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사회가 경제적 번영에 맞게 개인의 시간과 행복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주기를 희망한다.



콜린 그레이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한 후 기자로 일하다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스페인 등에서 근무하다 2011년 한국에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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