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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비디오] 추천작 '원더랜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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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엔 딱 한번 가본 적이 있다. 초겨울 무렵이었던가? 낮게 깔린 먹구름. 도시의 풍경은 우울했다.

회색 옷으로 무장한 런던 사람들은 동화에서 튀어나온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영화 '원더랜드'는 이러한 런던을 기억하는 이라면 그 살얼음 같은 풍경과 재회할 수 있는 영화다.

'원더랜드'에 나오는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좀처럼 웃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는 옆집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늘 짜증스럽다. 어느 20대 여성은 남자 친구를 구하기 위해 광고를 내지만 마땅한 짝이 없다. 아무도 웃지 않고,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더 가까이 그들의 사연을 들여다 볼까? 영화는 서로 떨어져 지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카페에서 일하는 나디아는 애인이 없어 쓸쓸해 미칠 지경이다. 미혼모 데비는 미용실에서 일하지만 벌이가 충분치 않자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는다. 에일린은 동네 강아지의 짖는 소리로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낼 날이 없다. 그녀는 강아지를 몰래 독살할 궁리를 한다.

제목 '원더랜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에서 빌어온 것. 앨리스가 토끼와 여왕.왕새우 등을 만나는 초현실적인 모험담이 이 영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어쩌면 '원더랜드'에 나오는 일상은 우리의 이상한 현실과 다르지 않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빌딩 숲과 매연이 지배하는 도심에서 정글을 헤매는 탐험대처럼 방황한다. 직장을 그만둔 남편은 아내에게 사실을 고백하지 못해 혼자 대사를 연습한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면 우리 자식인들 행복하겠어?" 어느 고독한 여성은 비가 내리는 날 버스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원더랜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매그놀리아'(1999년)를 많이 닮았다. 특정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대신, 다수의 불특정한 사람을 겹쳐 보여줌으로써 현대인의 삭막한 '도시 교향곡'을 완성해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이클 원터바텀 감독은 '주드'(96년)와 '광기'(98년) 등의 전작에서 인간 내면의 심연에 카메라를 들이댄 적 있다. 그는 진정 '어둠의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원제 Wonderland. 1999년작. 출연 셜리 핸더슨 등. 18세 이상 관람가.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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