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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젊은 왕, 도읍 옮기려다 민심 잃고 의문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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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호 26면

평양성 칠성문. 평양성의 북문이다. 성 앞에 방어용으로 작은 성(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때와 고려 태조 5년(922년) 각각 축조되었다. 1712년(숙종 38) 개축되었다. 조용철 기자

고려 제3대 왕인 정종(定宗: 923∼949년, 945∼949년 재위)은 즉위한 직후 왕규와 박술희를 제거해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왕식렴(王式廉)을 공신으로 책봉한다. 다음이 공신 책봉 조서다.

고려사의 재발견 정종① 서경 천도와 광군(光軍)

“그대(왕식렴)는 3대(태조·혜종·정종)의 원훈(元勳)이며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간신(*왕규)이 흉악한 무리들과 손잡고 변란을 일으켰다. 옥이 불에 들어가 더욱 냉기를 드러내고, 소나무가 눈을 맞고 더욱 푸르게 되듯이 그대는 역당들의 목을 베 기울어질 뻔한 나라를 바로 세웠다. 그대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어지러울 때 성실한 신하를 알게 되고, 센 바람에 질긴 풀을 안다’는 말이 그대를 두고 한 말임을 이제야 알겠다. 내가 만석(萬石)의 넓은 땅으로 봉하고, 9주의 목사직을 모두 준다고 해도 어찌 그대의 공적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고려사』권92 왕식렴 열전)

그런데 내용이 지나치다. ‘만석의 넓은 땅과 9주의 목사직’을 주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왕식렴을 치켜세우고 있다. 이는 정종이 재위기간(4년) 내내 왕식렴에게 기대어 정치를 하겠다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정종은 강한 군사력을 가진 측근에 기대다 장차 초래할 참혹한 대가를 알기나 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왕규가 제거될 때, 연루자 3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박술희가 제거될 때도 그를 호위한 100여 명이 함께 제거됐을 것이다. 이같이 왕식렴 군대에 의해 수백 명이 살육당한 정변의 현장, 개경은 공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것이다. 최승로는 “혜종·정종·광종을 거치면서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료 절반이 살해됐다”(『고려사』권93 최승로 열전)고 했다. 왕식렴이 숨진 뒤 광종의 개혁 때 희생된 관료 중엔 서경 관료가 많았겠지만, 개경 관료는 왕식렴이 가담한 혜종과 정종 때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희생됐다. 이 때문에 왕식렴과 정종에 대한 개경 관료들 및 이들과 연결된 호족세력의 반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또한 정종의 외가 충주 세력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다.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 광군(光軍)이 이 탑의조성에 동원된 사실이 탑의 기단부에 기록되어 있다. 경북 예천 소재. [문화재청]

공신 왕식렴을 과하게 치켜세운 진짜 이유
수도 개경은 정종이 왕 노릇을 하는데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정치의 무대를 바꾸는 것이 필요했다. 그 대안은 강력한 후견인 왕식렴이 있는 서경이다. 정종이 왕식렴을 과분하게 치켜세운 건 그런 정치적 포석에서 나온 것이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결심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즉위 직후 곧바로 천도를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서경 천도는 어느 정도 명분도 있었다. 정종의 부왕 태조 왕건이 일찍부터 서경을 재건하고, 그곳을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고구려 도읍지 평양은 황폐한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가시밭이 우거져 오랑캐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사냥하다 우리 변경을 침략해 그 폐해가 크다. 백성을 옮겨 이곳에 거주하게 해 나라를 오래도록 이롭게 하겠다.”(『고려사』권1 태조 1년(918) 9월조)

이어 태조는 사촌동생인 왕식렴을 보내 평양을 지키게 했다. 14년이 지난 932년(태조 15) 5월, 왕건은 “서경을 완전히 보수하고 민호를 이곳으로 옮겨 채운 것은 이곳에 의지해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여기에 도읍하려 한 것이다”(『고려사』권2)고 밝혔다.

평양 재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뒤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던 것이다. 천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평양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그가 숨지기 직전인 943년에 작성한 ‘훈요십조’ 5조에도 반영돼 있다.

“다섯째, 짐(태조)은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大業: 왕조의 창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大業)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사중월(四仲月: 4계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그곳에 행차해 100일 이상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태조는 천도는 할 수 없었지만, 국왕이 1년에 100일 이상 서경에 머무르며 왕조의 안녕을 빌 것을 희망했다. 풍수지리의 서경 길지(吉地)론이나 건국이념의 고구려 계승론 때문에 서경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현실적인 이유다.

태조는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 황주·봉주·해주·백주·염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켰다(『고려사절요』권1 태조 1년 9월조). 왜 이 지역 주민을 평양으로 이주시켰을까? 이들 지역은 옛 통일신라 최강의 부대인 패강진 부대의 근거지였다. 패강(浿江)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패강진 부대는 평양에서 평산까지, 즉 지금의 평안도·황해도 일대에 배치된 군대다. 중국 당나라는 신라의 삼국통일 뒤에도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신라가 함부로 개척할 수 없었다. 735년(성덕왕)이 돼서야 당나라가 비로소 이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승인한다. 신라는 군대를 파견해 패강진 일대를 본격 개척하기 시작한다. 패강진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조이옥, ‘통일신라 북방개척과 패강진’ 참고). 패강진 일대의 군대는 왕건 부자가 궁예에게 귀부할 때 궁예 휘하에 들어갔다가, 고려가 건국한 뒤엔 고려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패강진 부대는 고려 초기에도 여전히 왕조 최강의 지상군이었다.

태조가 서경을 중시한 현실적인 이유는 이곳 호족세력의 지지를 얻어 그들의 군사력으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삼한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경 길지론과 고구려 계승론도 그런 명분의 하나로 내세워진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건이 삼한통합 후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건 개경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개경이 왕건의 태생지이자 본거지라는 점도 그러했다. 후원자 왕식렴이 서경에 있었지만, 부왕의 선례로 보아 정종의 서경 천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즉위 후 곧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광군’ 30만 조직 과정서 호족과 대립
서경 천도는 947년(정종 2)에 착수하는데, 그 계기는 거란의 위협이었다. 태조의 문사인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은 중국 후진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체포되었다. 거란은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알고 관리로 임용했다. 947년(정종 2) 그는 거란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장차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 정종은 그에 대비해 30만 명의 광군(光軍)을 조직하고, 그런 조직을 관리하는 전담기구로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한다. 또 같은 해(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국경지역에 대대적인 축성도 한다.

축성은 단순히 성을 쌓고 방어시설을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군사와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군사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축성은 서경을 방어할 배후도시를 건설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정종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서북지역에 축성을 하면서 서경에도 축성을 한 점이다. 서경 천도는 이를 계기로 같은 해(947년: 정종 2)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즉위 직후 구상한 서경 천도가 반대에 부닥쳐 지체되다가, 거란의 위협을 명분으로 전국에 걸쳐 광군을 조직하고 국경지역에 축성을 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광군 30만은 실제 숫자이며,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 호족세력의 지휘 아래 조직된 전국 규모의 농민 예비군 성격을 지닌다. 광군은 유사시에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대다. 정종은 거란의 위협에 대처하는 가운데 호족이 지휘하는 군사력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했던 것이다.

경북 예천에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이 있다. 1011년(현종 2)에 완성된 석탑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광군 46대(隊: 1대는 25명), 즉 1150명이 동원돼 1년 만에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광군이 조직된 지 50여 년이 지났으나, 광군은 여전히 지방 군사조직으로 석탑을 조성하는 등 각종 공역(工役)에 동원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광군은 뒷날 고려 지방군인 주현군으로 편제된다(이기백, ‘고려 광군고’).

광군의 조직은 결국 호족이 지닌 군사력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종의 중앙정부는 광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서경 천도는 수도 개경 기득권층의 반발에 그쳤지만, 광군의 조직은 전국에 걸친 호족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이로 인해 서경 천도도 다시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됐다. 정종이 천도에 착수한 지 2년 만인 949년(정종 4) 1월, 서경의 왕식렴이 갑자기 숨졌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949년 4월, 정종 또한 26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같은 무렵 두 사람이 숨진 건 의문을 살 만한 일이다.

“(정종은) 도참을 믿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 장정을 징발하고 시중인 권직(權直)에게 명령해 궁궐을 경영하게 했다. 노역이 끊이지 않았다. 또 개경의 민가를 뽑아 서경에 보내자,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아 원망이 일어났다. 왕이 죽자 노역에 시달린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고려사절요』권2 정종 4년조)

정종의 서경 천도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원망을 불러일으킨’ 무모한 정책, 즉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이다. 더욱이 광군을 조직해 호족의 군사력을 직접 장악하려던 시도로 인해 반발은 더욱 거세었을 것이 분명하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모두 놓친 꼴이다. 명분과 취지가 훌륭해도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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