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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추적] 도시 상위권 학생 몰린다…농촌 고교들 대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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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국내 유학은 시골에서 도회지로 가는 이촌향도(離村向都)가 오랜 통념이었다. 그런데 최근엔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역(逆)유학 사례가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사교육 부담 없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분위기, 자립심을 기르고 인성교육에도 도움이 되는 기숙사 생활 등의 장점을 살려 신흥 명문으로 부상 중인 농촌학교들을 취재했다.

경남 남해군 평산리 남해해성고 교내의 느티나무 숲에서 21일 오후 진행된 영어 수업 시간에 2학년 학생들이 하문형 교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지은 영시(英詩)를 발표하고 있다. [남해=송봉근 기자]

자동차로 서울에서 4시간30분, 대구에서 3시간이 걸리는 경북 영양군 영양읍. 남쪽으로는 주왕산, 북쪽으론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육지의 섬’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읍내에는 그 흔한 입시학원 한 곳 없다. 그런데 사립 영양여고엔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그것도 중학교 때 성적이 최상위권인 학생들이다. 전교생 224명 가운데 영양 출신은 62명뿐이고, 나머지는 서울(10명)·경기도(9명)·인천(3명) 등 수도권과 대구·부산·충북·강원도·경남 등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다. 교실에선 각 지방 사투리가 섞여 들린다.

비결은 파격적 장학제도, 기숙형 교육

 1학년 유지인양의 아버지 유근섭(45)씨가 서울 강남에서 자란 큰딸을 낯선 산골 학교에 보내기로 한 건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의 망설임을 덜어준 건 학교 설명회였다. “학생들이 처음 보는 학부모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 게 참 신기하고 신선했습니다. 몇몇 학교를 다녀봤지만 학생이 학부모에게 인사하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요. 공부도 공부지만 인성교육도 중요시하는 학교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산골 학교로 간 딸은 전국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유씨는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금명자(52)씨 역시 아들 김태환(17)군을 시골 학교에 ‘유학’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태환군이 다니는 충남 홍성고(공립)는 집에서 승용차로 1시간30분, 대중교통으론 3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금씨는 “홍성고가 사교육 없이 학교 교육만으로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물론 인성교육도 충실하다”며 “기숙사 생활을 통해 자립심을 키운 결과인지 한 달에 두 차례 아들이 집에 올 때마다 부쩍 의젓해진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홍성고는 전교생의 3분의 1인 238명이 외지 학생이다.

 한반도의 남쪽 끝인 경남 남해군의 남해해성고도 전국에서 학생이 몰려드는 곳이다. 올해 입학생 116명 중 남해 출신은 31명, 나머지는 부산·대구·광주·울산 등 외지 출신이다. 신입생의 내신성적이 상위 8% 이내에 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이 학교는 2003년까지만 해도 전교생이 140명으로 줄어 폐교 위기에 몰렸었다. 인구가 6만3000명인 남해군 안에서만 신입생을 모집한 결과였다. 그러다 2004년부터 자율학교로 지정돼 전국 모집이 가능해진 데다 2007년 전교생을 수용할 기숙사를 완공하고 파격적인 장학제도와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내세운 뒤 외지 학생이 모여들었다. 지난해 입시에선 졸업생의 62%가 이른바 SKY(서울·고려·연세)대를 포함, 수도권 대학에 진학했다.

 농촌 학교 중에는 대학 입시에서도 도시 학교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면서 신흥 명문학교로 떠오른 곳이 적지 않다. 전남 장성고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인구 1만4000명의 한적한 장성읍내 중심부에서도 떨어져 있어 반경 500m 안에는 가게조차 하나 없다. 그런 시골 학교가 2012학년도 수능 표준점수 언어와 수리 가·나, 외국어 등 4개 전 분야에서 전국 1위의 성적을 냈다. 올해 입시에서도 서울대 4명, 연세대·고려대 24명 등 수도권 대학에 193명을 진학시켰다. 전교생 775명 가운데 681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수준별 이동수업 등으로 면학 분위기를 조성한 결과다. 그러다 보니 이 학교에 들어가려는 입시 경쟁이 치열했다. 학교 측은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뽑을 경우 지역 출신에겐 기회가 줄어든다는 주민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입학정원의 45%는 장성군 출신에게 할애해 왔다. 또 4년 전부터는 전남 출신으로만 입학자격을 제한했다.

30% 이상이 외지 학생 … 자기주도 학습

 농촌 학교들이 학부모들의 관심을 끌면서 명문학교로 부상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공부를 시켜준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기숙학교’의 장점을 십분 살린 것이다. 20일 오후 8시 경남 함안고를 찾았을 때 교실 곳곳엔 불이 환하게 켜진 채 보충수업이 한창이었다.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을 따로 모은 고급반·심화반은 특강에 열중했다. 인근 체육관에선 20여 명의 학생이 배드민턴을 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무도 빈둥거리며 노는 학생이 없었다. 이 학교는 오후 7~9시 보충수업을 하고 오후 11시30분까지 개인 자율학습 등 25개 교과 프로그램(수준별·선택형·심화학습)을 운영한다. 성적순으로 뽑는 190명의 기숙사생은 오전 6시 기상, 자정 취침을 엄수하고 정해진 시간 외에는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되는 등 생활규칙을 따라야 한다.

입시 교육만? 예체능에 인성교육까지

 이런 상황은 장성고, 남해해성고, 홍성고 등에 공통적이다. 황상길(57) 장성고 교감은 “기숙사가 있으면 등·하교에 따른 불필요한 시간을 절약하고 방과후·주말·방학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사교육이 필요 없는 학교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영양여고 3학년 김은미(18)양은 “학교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도 없고 외박도 한 달에 한 차례로 정해져 있어 전교생이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며 “대도시 학생들은 다양한 유혹에 흔들리기 쉽지만 우리 학교는 그런 걱정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농촌 기숙학교들이 입시교육에만 ‘올인’하는 것은 아니다. 예·체능 활동과 사회봉사 등 인성교육에도 열심이다. 전남 보성고 학생들은 토요일마다 주민과 함께하는 지역명산 등반, 초등학교 교사 도우미 활동, 주민 음악회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보컬밴드·미술·사물놀이·요가 등을 배운다. 갯벌 지질탐사, 천체 관측활동, 하천생태 탐사, 텃밭 채소 키우기, 주말 등산 같은 시골 학교에서 가능한 프로그램은 홍성고의 자랑거리다. 홍성고 김선완 교감은 “명사 초빙 특강, 학생별 학습 컨설팅으로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자기주도적 학습도 가능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함안고 학생들은 1인 1체육과 1악기를 목표로 매주 4일간 2시간씩 체육·음악활동을 한다.

학부모 “사교육 안 해도 좋은 성적 만족”

 학부모 입장에선 사교육비를 들이지 않고도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농촌 명문고가 출현하게 된 계기는 200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율형 공·사립고 지정을 받아 전국 단위 혹은 도(道) 단위로 학생을 모집할 수 있게 된 게 계기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고교 다양화 300프로젝트’에 따라 전국 150개 공·사립 고교를 기숙형 고교로 지정하면서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기숙형 고교는 교육부의 교육과정 60% 외에 40%를 자율 편성해 국·영·수를 집중 공부시킬 수 있고 교장공모제·교원초빙제를 통한 우수한 경영·교수진 구성이 가능하다. 이명박(MB)정부는 기숙형 고교에 기숙사 건립비와 운영비로 해마다 2000억∼3000억원대의 예산을 지원했다. 이에 따라 전국 2287개 고교 가운데 기숙사를 운영하는 인문계 고교는 2008년 584개에서 2012년 837개로 늘었다. 또 예산 지원 덕분에 학부모들이 내는 기숙사 비용도 매달 12만~25만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기숙학교가 농촌 학교와 지역을 동시에 살리는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이런 현상이 중학교로도 확산되고 있다. 2009년 개교한 충북 보은의 속리산중학교가 그 예다. 경남·경북·충북교육청은 농촌의 소규모 중학교 2~4개를 통합한 거점형 기숙 중학교 설립을 추진 중이다.

광역취재팀=황선윤·차상은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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