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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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나와 백년의 열차를 타야할 그 여자는

그 사람이 운전하는 미8군의 차를 탔다 -정공채

짙은 화약 냄새와 피 냄새를 풍기며 전쟁이 지나간 1950년대의 이 땅에는 미8군의 차들이 '달콤한' 휘발유 냄새를 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헬로 기브 미 초콜릿!" 전쟁 고아들이 고사리손을 뻗칠 때 미군 병사들은 휘파람으로 화답해 주었다. 시인의 눈은 우주 밖까지 내다 볼 수 있는 망원 렌즈를 달고 있어서 그들이 사는 시대의 풍경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어린 날에 뜨던 물수제비나 고무줄 새총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막아주려고 진주한 주둔군의 트럭을 보면서 자란 정공채는 오랫동안 화두처럼 익혀온 시 '미8군의 차'를 1963년 머리맡에서 사흘동안 신들린 듯 써내려 간다.

하나의 오브제를 놓고 1천5백행이나 써낼 수 있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시는 그해 '현대문학'12월호에 전재 됐고 국내 시단의 스포트라이트는 물론 일본 문학계가 떠들썩하게 받아주었다.

'신일본문학''신작가''현실과 문학'등에서 이 시를 일어로 번역.전재 또는 초역을 해 실었고,베스트셀러의 저널리스트 오다 마코도는 '제3세계의 문학'을 편집하면서 한국문학으로는 오직 이 작품만을 다뤘다.

이렇게 일본 문단에서 문제작으로 읽히는 것에 발단이 됐는지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몇 차례 찾아와 신원조서를 꾸미더니 64년 3월 드디어 "반공법 피의자로 유의지사가 유하오니 당소에 내사할사"의 통지서를 보낸다.

'미8군의 차'는 이데올로기나 반미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사회현상을 서정적으로 녹여낸,다만 힘 있는 시였다.

시에 대한 감별능력이 없는 중앙정보부는 이 시가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점과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반미적 정서를 반공법의 저촉으로 보았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중앙정보부는 시인의 시를 문제삼아 반공법으로 옭아매는 필화사건을 꺼렸음인지 조지훈.김현승.김용호.조연현 등에게 시의 분석과 반미적 성향을 감정케 했다.

의뢰받은 시인과 평론가는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시" "자유민족정신을 살린 서사적 서정시"라고 평을 했고 이 문단 중진들의 보증서(?)를 받고 정공채는 풀려난다.

"바퀴는 나의 맨발이 못 따르는/휘발유를 타고/바퀴는 굴러갔다" "버드나무에 말을 맨 주둔/자본이/땅 위에서 황혼 때의 꽃밭같이 꽃으로 피었다" .시 '미8군의 차'는 연인과의 대화처럼 잔잔하게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이야기로 들려 준 것이었다.

정공채는 34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 농림중.고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인 57년 '현대문학'11월호에 시 '종이 운다'와 다음해 4월호에 '하늘과 아들'로 박두진의 추천을 받는다. '석탄''대리석'등 이땅의 식물성 체질의 시를 광물성으로 바꾼 정공채 형은 칠순 나이인데도 '미8군의 차'만 꺼내면 지금도 얼굴에 핏줄이 선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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