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원로는 살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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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며칠 전 재미난 뉴스가 들어왔다.

다음달 23일 열릴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기로 내정된 원로 배우 피터 오툴이 수상을 거부했다는 소식이었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오툴은 아카데미 조직위 측에 편지를 보내 "나는 아직 게임 중인 배우이기 때문에 시상을 10년 쯤 뒤로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로서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자신감이다.

아카데미상 주최 측의 대응도 흥미롭다. "공로상은 은퇴 배우에게 주는 게 아니다. 공로상을 받는다고 게임이 끝나진 않는다"며 오툴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요청했다. 또 오툴이 시상식 당일 행사장에 참석하든 안하든 이번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언뜻 전설적 배우 오툴과 아카데미 측 간의 불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외신을 꼼꼼히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원로 배우의 공적을 정당하게 대접하려는 아카데미 측과 그럼에도 현역 배우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오툴의 신경전일 뿐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오툴은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를 시작으로 '칼리귤라'(79년),'스턴트맨'(80),'마지막 황제'(87년),'팬텀'(98년) 등에서 선 굵은 연기를 펼쳐왔다. 그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일곱번이나 올랐으나 아쉽게도 트로피는 한번도 품에 안지 못했다.

그가 공로상을 두 손 들어 반기지 않은 속사정이 이해된다. 하지만 아카데미 측은 폴 뉴먼도 공로상을 수상한 직후 '컬러 오브 머니'(87년)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던 사실을 일깨우며 오톨을 설득하고 있단다.

부러운 생각이 든다. 온갖 입방아가 끊이지 않는 할리우드지만 원로 배우의 파워가 그만큼 살아 있다는 증거다.

예컨대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금도 감독으로서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충무로엔 어떤 원로가 있을까. 연기면 연기, 제작이면 제작 등 영화 만들기의 지혜를 전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한세대 정도 지나면 한국판 오툴이 나올 수 있을까.

한국 영화사도 어느덧 1백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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