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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태평「무드」사치와 낭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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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시국이 장차 어떻게 돌아갈 것 같습니까? 곧 전쟁이 일어나지나 않을까요?』
특히 국제정세에 밝은 전문가도 아니요, 주역을 연구한 예언자도 못되는 나에게까지 이러한 물음을 던진 사람이 꽤 여럿 있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의외로 심각한 것이라고 보 아야 할 것이다.
『시국을 안정시키고 전쟁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땅히 이렇게 물었어야 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지진이나 태풍처럼 불가항력으로 일어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잘못해서 생기는 인재의 비극이다.
그리고 오늘의 형세에 있어서는 지혜와 힘을 다하여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꾀하진 않고 『혹 전쟁이 나지나 않을까? 전쟁이 난 뒤엔 어떻게 하면 살아 날 수 있을까?』하고 전전긍긍하는 바로 그 소극적이요 비겁한 자세가 저 비극을 초래하는데 크게 이바지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금값이 오르고 쌀값이 뛰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 가운데 멀리 달아날 비행기표를 산 사람도 있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그따위 이기적 행동과 그러한 풍문, 그리고 그러한 풍문의 근원인바 특권층이 받는 불신이 또한 전쟁이라는 비극을 부르는 원인의 일부가 된다.
오늘도 고급 요정에서는 주색의 향락이 시간의 흐름을 잊고, 번화한 거리에는 화려한 옷 차림이 사치의 극치를 다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세력 또는 잇권을 다투기에 여념이 없다. 마치 요순도 무색할 태평성대와도 같다.
이 태평세월의 「무드」, 이것은 언뜻 보기에 저 전전긍긍하는 겁장이의 자세와는 정반대의 경향을 표명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관찰이다. 실인즉 저 겁장이의 자세와 이 태평세월의 「무드」는 결국 같은 정신상태의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단적으로 말한다면 쌀과 금을 사들이고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유흥과 사치와 낭비 그리고 잇권 싸움에 여념이 없는 그 사람들이다. 그것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피난의 길을 강구하는 그 악착스러운 생명의 애착은 족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육체의 쾌락을 좇음이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소이임을 부인할 생각도 없다. 문제는 그 길밖에, 그보다 나은 길이 없느냐에 있다. 전쟁이 난 뒤에 남보다 먼저 달아날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아예 전쟁이 나지 않도록 미리 단속을 해야한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는 온 국민이 모두 잘 살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며 우선 당장 일시적인 향락에 도취하기보다는 자손 만대까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다. 그리고 온 국민이 모두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자손만대까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슬기로운 자세는, 곧 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사치와 유흥과 낭비 그리고 잇권 다툼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간첩의 철도 폭파, 수도 근방에 나타난 「게릴라」따위의 어떤 사건이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군사나 국방의 당면문제를 떠나서 보더라도 우리는 근면하고 절약하며 협동하고 단결하여, 국가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우리가 올바른 정신적자세로 할 바를 다하여 안으로 허약한 점이 없었다면 감히 밖으로부터 침공하지도 못할 것이며, 비록 침공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근심 할 정도가 못될 것이다. 나라 일의 파탄은 항상 안으로부터 시작한다.
근면과 절약과 협동과 단결이 요구된다는 여론이 일어난 것은 이미 오래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천에 욺겨지지 않은 것은 그러한 덕목이 실천되기에 필요한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한 사람보다도 결탁과 매수 또는 밀수 따위의 나쁜 짓만 하는 인간들이 더 잘사는 사화에서는 누구나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고 싶은 의욕을 잃기 마련이다.
공정 내지 사회정의를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일의 책임은 각계각층이 나누어야 할 것이나, 그 책임을 더욱 무겁게 져야 하는 것은 지도층이며, 지도층 가운데서도 특히 위정자들이다. 『국민일반에게 어떤 윤리와 실천을 호소하기에 앞서서 위정자 내지 지도층의 솔선 수범이 아쉽다』는 진부한 혁신을 여기 되풀이한대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우리의 기강이 문란한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위정자 내지 지도층을 일률적으로 불신하고 항상 냉소와 비방으로써 부정하는 것도 현시국을 처하는 국민의 자세로서 바람직하지는 않다.
위대한 대중만이 위대한 지도자를 가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서울대문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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