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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 한계 드러낸 청와대 위기관리 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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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왼쪽)이 12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허 실장이 기자회견을 끝낸 뒤 “국민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허 실장 오른쪽부터 곽상도 민정수석,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이정현 정무수석, 주철기 외교안보수석, 최순홍 미래전략수석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남기 홍보수석이 ‘재수가 없게 됐다. 성희롱은 변명해야 납득이 안 되니 누가 되지 않게 빨리 귀국해야 한다’고 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 11일 기자회견에서)

 “귀국을 종용한 적이 없다. 담당 행정관과 상의해 결정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남기 수석, 11일 반박 브리핑)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 홍보라인으로 함께 일했던 이 수석과 윤 전 대변인이 ‘도피 귀국’의 책임을 놓고 다투는 어이없는 모습이 연출됐다. 청와대의 기강이 얼마나 풀어져 있고 위기 대응 시스템은 얼마나 부실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 전 대변인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중도 귀국의 책임을 이 수석에게 돌렸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씨는 12일 “참모끼리 책임을 떠넘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비서는 대통령이 잘못을 해도 자기가 뒤집어써야 하는 자리다. 참모들이 도대체 청와대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공적인 인식이 부족한 채 청와대에 들어간 것 같다”고 지적했다.

 국격에 먹칠한 ‘윤창중 스캔들’ 충격파가 청와대의 위기 관리 능력 부재 논란으로 옮아가고 있다.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매몰된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청와대의 안이한 인식과 부실한 위기 대응 능력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우선 사건의 초동단계 대처가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청와대는 사건 인지 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기까지 26시간 동안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변인 증발’ 사건을 문의하는 기자들에겐 “부인이 많이 아파 급거 귀국했다”고 둘러대기에 급급했다.

서울에 남아 청와대를 지휘했던 허태열 비서실장도 9일 이 수석으로부터 워싱턴발 LA행 ‘1호기’에서 사태를 보고받고 회의를 열긴 했지만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대통령 일행이 서울에 도착한 후 이 수석이 “국민 여러분과 박 대통령께 사과드린다”고 심야 회견을 열었지만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켰다.

노무현정부에서 첫 정무수석을 지낸 유인태 민주당 의원은 “이 정도 사안이면 현장에서 수석급 참모들이 먼저 회의를 했어야 한다. 이런 시스템만 갖춰졌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라며 “특히 보고 시간이 상황 인식 26시간 후라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유 의원은 또 “홍보수석은 대통령을 대신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는 자린데도 갑자기 대통령에게 사과한다는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며 “청와대가 국민보다 대통령을 더 무서워한다는 말 아니냐”고 꼬집었다.

 이 수석은 귀국 직후 대통령에게 보고가 늦어진 데 대해 “대통령께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들어가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아니다”고 했다. 대통령 주변에 보이지 않는 장막이 있음을 스스로 시인한 발언이다. 이같이 심각한 사안에도 참모들이 ‘불쑥불쑥’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기때문이다.

 청와대에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한계도 드러났다. 청와대는 경질된 윤 전 대변인이 멋대로 기자회견을 할 때까지 사태를 방관했다. 이후 ‘중도 귀국’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벌어졌지만 소극적 대응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는 “청와대 참모들 중에서 강력한 통제력을 갖고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허태열 비서실장이 12일 오후 뒤늦게 “이번 일은 법을 떠나 상식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며 “저를 포함해 누구도 책임질 일이 있다면 결코 피하지 않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허 실장은 “이 수석이 귀국 당일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바 있다”는 말도 흘렸지만 실제 윤 전 대변인 외에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또 초동단계의 안이한 대응으로 이틀 만에 두 번째 ‘사과’를 해야 했지만 국민의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알맹이 빠진 회견에 불과했다.

 이날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에서도 관련자 문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뤘다. 원조 친박계인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은 “대통령을 모시는 기본 자세가 안 됐다. 이 수석은 책임을 면할 길이 없게 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주영 의원도 “청와대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홍보라인이 책임지는 일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윤창중 스캔들’이라는 초특급 악재는 대통령 임기 80여 일 만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나온 일보다는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더 많다. 따라서 이번 기회를 통해 근본적 수습책과 함께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대폭 쇄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명지대 윤종빈(정치학) 교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참모들이 대통령만 바라보고 내부 위계질서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 만큼 박 대통령이 참모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며 “수첩 인사에서 벗어나 여론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선의 새누리당 조해진 의원도 “지금이라도 시스템 정비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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