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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근대시의 기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해외문학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에 발간된 「태서문예시보」는 한편으로는 유망한 신진시인들에게 지면을 내주어 다음에 올 자유시에의 교량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그중에서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낸 신인으로 송아주요한, 안서김억,상아탑황석우를 들수있다.
이들은 종래의 신체시형식에 얽매지 않는 여러모로 달라진 작품들을 들고나와 근대시를 지향, 접근해가고있었다. 우선 시어의 선택에서부터 그것을 구사하는 방법이 정교하고 낡은 굴레에서 한걸음 벗어난 표현을 시도한것은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이때까지육당·춘원이 「소년」과「청춘」을 통해 시험한 44조, 75조의 신체시는 이렇다할 발전적계기를 갖지 못한채 10년간 창가투로 제자리걸음을 친셈이다.
근대시로서의 뚜렷한 모습을 갖추고 처음으로 나타난 주요한의 「불놀이(창조·창간호) 는 『완전한자유시의 선구』 (월탄의말)로서 선풍을 일으켰다.
「창조」지는 1919년2월에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서 발간한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로서 창간당시의 동인은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환등이 었다.제3호부터는서울에서 발간되었고 후기에 이광수·김억·이일 그밖에 여러문인들이 참가하여9호까지 나으고 패간되었다.
「창조」를 발간하게된 동기를 김동인이 「조광」지 (제4권6호)에쓴 글과 주요한의 회고담을 통해 종합해보면-.
1918년겨울 일고에재학중인 주요한이 김동인의 하숙집을 찾아와 문예지발간에 대한 의논을 했다. 명치학원시절 교지를 편집한 경험이있는 주요한의계산에 의하면 창간경비로2백원을 마련하면 제2호부터는 적자를 절반으로 감안해서 매월 1백원씩의출자로 운영이 가능하다는것이었다.
당시의 2백원이라면 꽤큰액수였으나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인 김동인의형편으론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
즉석에서 합의를본 두사람은 동인을 모집하고 한국신문학건설의 역군임을자부하면서 기염을토했다.
그때까지 볼수없었던 구체적인 문예활동,순문학운동은 이런연유로 발단이된것이었다.
동인들은 김동인의 하숙집을 편집실삼아 원고도쓰고 교정도 보았다. 편집은 주요한의 담당이었다. 잠이오면「코피·시럽」을 먹탕물처럼 진하게 타마시면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당시 국문활자가 있는곳은 「요꼬하마」(횡빈)의 복음인쇄소였다. 인쇄공들은 물론 일본인들이었고 그들이 한글을 알리 없었다. 글자 모양만 보고 문선을하기 때문에 교정 때는 갑절이나 골머리를 앓았다고한다.
눈을 떠보니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더라는 얘기는 영국시인 「 바이런」 의경우였다지만 주요한은 「불놀이」를발표하고나서 일약 문명을날리게되었고 말기에 동인(창조) 으로 참가한 김억과함께 근대시운동의 선두에 서게된것이다.
두시인은 초기에 주로 영국과 불란서의 이른바 「로맨틱· 심벌리즘」 시인들의영향을 받은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주요한은 「로버트·번즈」「바이런」 등의 영시와 여좌야관이 일역한 불란서시인들 (상징파) 의 작품을 탐독하고 도취되어 모르는새에 미지의세계에 끌려들어갔다고 옛날을 돌아보면서 술회한다.
이와같이 두시인이 모두 초기에는 서구시인들의 영향을받고 출발했으면서도 뒤에는 한국적인 서정에 귀의하여 각각 자기세계를구축했다는것은 주목할만한일이다.
근대시사의 첫장을 장식한 「불놀이」는 종래의 정형적인 격조와 구속에서완전히 벗어나 그것을 해체하고 산문속에 자유분방한 시상과 자연스러운 운율을 담았다는데서 한국시의 미래를향해 켜든 커다란 하나의 횃불이었다.
또김억은 많은 창착시를쓰면서 번역에도 손을 대어 1921년에 내놓은 최초의번역시집 「오뇌의무도」에는 「베르레느」「보 들 레 르」「예이츠」등 불·영시인들의 작품90여편을 수록했다. 이근처에 「에피소드」한토막이 있다. 안서의 역시집이 나온 그얼마뒤에 무애 양주동이 「타고르」의 시를 번역해서 어떤 문예지에 게재한 일이있었는데 한귀절에 오역이 있었다. 늘 날카롭고 도전적이던 김억이 예사로 그것을 봐넘길리 없었다. 당장 지상으로 그오역을 지적했다. 화가난 무애는 『당신의 오뇌의무도」 는 「개똥번역」인데 무슨 큰소리냐』고 응수해서 유명한 「개똥번역」논쟁이치열하게 벌어졌다는것.
근래 국어사전을보면 이때 생겨난 「개똥번역」이란낱말이 수록돼있다. 말뜻은원문아닌 다른 외국어에서 중역을 했다는 것인데, 중역이었는지 직접 번역이었는지 확인할길은없다. 어쨌든 외국문학을 거의 대할수없었던 당시에 있어 「오뇌의무도」는 우리시에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끼친것은 물론이다. 그공과는 따로따져봐야할문제지만-.
1923년에 낸 김억의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는개인시집으로 또한 최초의것이었다. 여기엔 서정조의 소곡을 주로한 작품 85편이 실려있다. 그는 서구문학에서의 영향을 겉으로 드러내지않고 그것을 보이지않는 밑거름으로해서 향토색 짙은 민요적 소곡을 엮는데 선천적 재질과 특색을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일관해나간 시인이기도했다.(인태성기자)

<기사에 협조하신분="주요한" 양주동 백순재 이일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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