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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의 비의(2) -김동리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마리아, 내 말을 믿어주어, 나는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야.그렇지만 나는 여자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수는 있어.이건대체로 사랑과 같은 것일 거야.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아무리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아무 여자나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왜 이렇게 죽음이 두렵지않고 오히려 시원한지 알수없다)(8장)
이처럼 사반은 그 의식면이 단조하면서도 굵은 원시적 매력이 넘쳐있지만 그러나 그는 현대독자의 내적요구를 채워줄 수 없는 것이다. 근대이후 소설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개인의 자아문제이다.
영웅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알프스」를 넘는「나폴레옹」은「버스·스톱」에서 초조한 빛으로 손목시계 태엽을 감는 소시민이 돼버렸다. (사반을 니체의 초인 혹은 키릴로프의 인신과 같은 계보에 넣어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양자의 의식내용이나 역사적 조건이 동떨어져 있어 그건 무리한 해석이다.) 한편, 사반으로 하여 예수는 역설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으냐고 볼는지 모르나 그러기에는 예수의 묘사가 너무 안역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부활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육신이 그대로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완고한 시다. 만약 문제가 어디까지나 그의 시체의 행방에있는 것이라면 처음보더 자진하여 그것을 인수하려 나타났던「아리마데·요셉」이 그만한 용기와 정신의 사람이 왜 그의 부활을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맞이하지 못했던가하는 사실과 아울러 생각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부활에대한 작가의 이유일한 의견은 군더더기이다. 예수부활의 중요성은 그상미적의의에있지, 시체의 행방문제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전기한「백치」가 부활한 예수의 후일담처럼 읽혀지고「사인」은 문자그대로 후일담의 형식을 취한것을 보아도 본고장의 작가들이 얼마나 부활의 의의를 중시했는지 알수있다(동리도 후일담을 썼는데-「부활」-그건「아리마데·요셉」이 이 가사상태에있는 예수를 몰래 구해낸지 사흘뒤의 새벽, 예수가「유다」를 만날일이 있다하여 자취를 감추었다는 줄거리의 소품이다).
좁혀 말하면「사반의 십자가」에서 예수는 전경에 나오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그럼 이 장편의 역점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사반과「막달라·마리아」이다. 둘중 사반은 이미 언급했으므로「막달라·마리아」를 본다면, 이 작품의 회전축인 마리아의 경우 한가지 기묘한 일은 작자가 예수의 경우와 달리 반드시 원전에 충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일단「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요,「죄 많은 여인」이라고 나오지만, 그 마리아가 예수의 제자가된 결정적 계기를 작자는 친오빠 사반과의 부지중의 근친간에서 온 죄의식에 둔 것이다.
「구원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심각한 절망」에 빠진 마리아는 빌리보를 통하여 예수를 찾아간다. 시온의 집이다.
그녀는 나아두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눈물을 흘린다…과거의 타락한 생활, 그 중에서도 가장 뼈 아픈죄 (근친간) 를 뉘우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고 정관념과 어긋난다. 성서에 그렇게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막달라·마리아」는 창부로서만 문학이나 미술에서 그려져왔고,「도스토엡스키」의「성창녀」「소냐·말메라도브」의 원형도 거기에 있었다. 또한「아가패」의 발현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이「시몬」의 집 마당의「신」은「크리스천」이건 아니건 양심의 시금석이 되어왔었다. 그런데 그「마리아」의 눈물의 근원을 근친간에 둔다면 그녀에 대한 전통적 관념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만인의 여자였던 창부의 대중사회적 성격이 원시적 근친간이라는 외줄기로 좁혀져, 말하자면「아가패」의 바다와 같은 보편성을 잃는다. 그리하여「르낭」이『저 사랑의 숭고한 능력! 환상에 휩쓸린 여인의 애정이 부활한 신을 온 세상에 전해주는 성스러운 순간』(예수전) 이라 한 부활에 강렬히 이어지지 않는다(본고장 사람들이 읽으면 더욱그럴 것이다).
그럼 동리는 왜「막달라·마리아」와「사반」의 근친간을 설정했을까? 문제는 이점이다. 내가 앞서「사반의 십자가」가「무녀도」나「황토기」의 연장선위에 있다고 본 것은, 사반과 황토골 장사들의 환경 (피압박민족의 울분)이나 체질의 유사성도 그렇지만, 그 초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금동리의 일연의 소설에는 원시에의 향수와 더불어 근친상간의 피가 흐르고있다.「무녀도」「황토기」「역마」「늪」과「사반의 십자가」등이 이 계통이다.
근친간은 소아기의 원시적 욕망이다. 그만큼 본능적인 것이다. 고대「하와이」와「인카 페루」, 특히 고대「애급」왕가애서는 피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이 공연한 관습이었다는 것. 한편 보다 많은 원시부족 사이에는 지금도 그게「터부」가 돼 있다는 것은 이 근친간의 인력이 얼마나 큰가를 반증해준다.
그런데 동리의 그 작품들에 나오는 혹은 암시된 근친간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무녀도」(욱과 냉이)와「황토기」(돌쇠와 분이)「늪」(석의 어머나와 석의 할아버지)의 경우는 그야말로 원시적이다. 그들은 한쌍의 뜨겁고 순수한 동물이나 같다. 그들의 근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따라서 뉘우침이란 있을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역마」의 성기와 계연,「사반의 십자가」의 사반과「막달라·마리아」의 경우에는, 앞의 세 작품에서는 근친간이 암시돼 있는 반면 여기선 명시돼 있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 비극은「막달라·마리아」와 성기가 인륜을 거역하는 죄를 범했음을 뒤늦게야 깨닫는 데서 온다. 그들의 고통은 근친간 그 자체에 있는게 아니라 근친간의 인식에 있었다. 그런 인식위에도 성기의 계연에 대한,「마리아」의 사반에 대한 정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
그들의 이 인식과 고통의 연옥은 그러나 그들을 파멸시키지 않고 도리어 구제하고 소생하게 만든다. 이에「마리아」는 과거의 죄 많은 여인이 아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침착한 목소리로 (유다에게)『아니예요. 저에게는 다른 생명이 있어요…주님께서 생명을 주셨어요. 다른 생명을. 저는 그전생명은 다 잊어버렸어요.』(7장) 성기는 어머니의 실토를 듣고 모두들 가망없게 본 중병에서 홀연히 살아난다.
옥화의 이 마지막 하직같이 하는 통정이야기(계연은 실은 성기의 이모였다는 사실…필자주) 에 의외로도 성기는 도리어 힘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 불타는 듯한 형형한 두 눈으로 천정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성기는 무슨 새로운 결심이나 한 듯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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