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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우리의 미래상을 탐구하는 67년의 「캠페인」|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시즘(대표집필 김재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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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주시대의 종교>하나님 말씀에 산다
우리가 보통 세계라고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세계, 과학이 열쇠를 차지하고 기술학이 실생활을 지배하는 현대의 세계, 흔히 말하는「우주시대」의 세계에서의 종교를 생각하려는 것이다. 이 세계는 중세시대에서처럼 종교가 왕좌를 점하고있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생활주유에서 밀려나고 흥미의 중심에서 제외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히 그러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학의 세계 학의 세계일수록 종교는 더욱 필요하다.
기술학을 통한 기계의 위력과 그것에 의한 물질생활의 번영이 인간문제를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현대인의 고민 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두세계를 함께 갖고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씀으로 산다」는 성구에서와 같이 떡과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생활의 필수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우주시대라는 현대인일수록 종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종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종교인 또한 중세나 근세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우주시대의 세계를 상대한다는 의미에서 자체를 변신시키고 세계와의 관계를 바로 조정해야할 것이다.

<위기의식>물질생활의 과대번영
기술학적 문명에 의하여 급격하게 변혁되고있는 세계에서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핵무기에 의한 일류전멸을 목전에서 상상할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조성이다. 기독교인은 신학적으로 언제나 위기의식을 갖고있는 것이다(김태선) 그런데 핵무기에 의한 멸망가능성이 기독교의 종말신앙에 관련되는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현대세계안에서의 종교가 윤리면에서 이것을 가장 위험한 「이슈」로 다루지 않을 수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과학문명의 독주에「브레이크」를 가해야한다(윤성범)는 지론이 이런 점에서도 고려되어야 하겠고 물질생활의 과대한 번영이 기독교신앙에유해할뿐 아니라 인류의 행복에「거침돌」이된다(김태관)는 점도 생긱해 줬으면한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식은 일반에게는 거의 없다 덮어놓고「근대화」만하면 잘산다고 낙관한다(장병길). 그러므로 계몽이 필요하다. 그밖에도「동서문제」곧 공산과 자유와의 두진영의 의식적 대립과 냉전, 남북문제 곧 빈국군과 부국군과의 대립문제등이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런 세계 문제에 기독교가 진지하게 개입하여 최대의 정의와 화해운동을 전개하지 않는다면「게으른종」이라는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젯거리들이 모두「기독교국가」에서 만든 것이 아닌가? 가장 많이 사랑을 말하는 나라들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있지 않는가?(장병길)
지금 문제되고있는 과학과 기술학의 산모도 본가도 기독교국가들이아닌가? 그런 점에서 기독교자체에 무슨 잘못이 있지 않을까? 불교에서의 절대 평화적인 무아, 해탈에서의 자비행같은 것이 참고되어야할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의 사랑은「나는 사랑하는 자」요 「너는 사랑받는자」라는 자의식에서 해방되지 못한 거리를둔 시혜행위가 아니었던가? 기독교가 좀더 자기를 세계에 개방해야 세계가 마음놓고 기독교에 접근할수있을것이다(장병길)

<타종교와의 관계>대화통한 평화공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를 두고 토의하는 것이다. 그러나「세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제목을 놓고 말한다면 다른 종교들도 화제에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주시대의 인간문제를 기독교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타종교들을 등한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화의 이해로 평화롭게 공존해야한다(윤성범). 오히려 공존의 선을 넘어서 공통된 인간성에 의거한 동역자 의식에까지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차「교리」부터 따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실속없는 이론투쟁을 자극하여 친교를 손상시킬 우려가 많다. 어떤 공통된 윤리문제, 사회문제 등에 공동노력을 제공하는 것부터 장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이미 저질러진 세계문제들을 이제 와서 불교적인 「무아정적」에 맡길 수도 없으므로「결자해지」라는 입장에서라도 기독교 자신이 책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문제의 평화세계보다는 문제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그리고 또문제를 만들면서 적극 전진하는「다이너믹」한 종교가 세계문제를 담당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것이 원래 그렇게 고민하면서 자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재일치·평신도운동>WCC와「로마·가톨릭」
기독교와 기독교국가들에 대한 고발은 당연한 것이며 기독교자체내에서도 근본적인 반성과 재검토가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위기를 품은 현대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적인 봉사와 그 구체적인 방안과 이론에 대한 연구 실천도 놀랍게 전개되고 있다.
재일치운동은 1910년이래 소위「에큐메이컬」운동의 활발한 전개로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약칭 W·C·C)가 조직되고 제3회 세계대회때에「동정통교회」가 이에 가입되어「흐로테스탄트」교회 제교파와 정교회가 일치의 길을 걷게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아직도 정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이재일치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사실상 같은 방향을 걷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기술문명의 급격한 혁명을 억제하거나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문명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맹점을 고쳐나가는 「누툭」의 역할은 담당해야한다. 이 일을 위하여 전세계 기독교회는 하나로 뭉쳐야한다. 분산된 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그대결하는 문제가 세계적인 거대한 난제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자체갱신의 과제도 포함된다.
다음으로「하나님의 백성」운동, 일반적으로 이른바「평신도」운동이 있다. 종교가 교직자중심에서 평신도중심으로 옮기는 것이다. 직장 기타 사회생활에 직접 관여하는 기독교인은 일반신도요, 교직자는 교회안 일만으로도 여력이 없는 것이다. 교직자는 평신도들의 대사회참여에「비전」과 「방향」과 「자세」를 가르치고 신념과 사명을 심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정치·경제·문화·교육등 모든 인간생활부문에 참여하고 그 생활자체를 종교의 권내에 포섭하며 그 생활을 통하여 자기의 종교적 신앙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 세계문제 해결에 봉사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전세계각국의 7억 신도가「흩어진 교회」로서 사회 안에 촉수를 벌리는 것이며 이것이 이 위기를 품은 세계에서 기독교가 최선의 봉사를 시도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카톨릭」에서도 노동사제등 각가지 방법으로 이방향을 취하고 있으며「프로테스탄트」에서도 여러 모양의 평신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하여 세계적인 「레벨」에서 각국의 정상파악, 연구, 토의, 방향설정등 구체적인 공작을 진행시키는 세계대회가 있었다. 1946년 「제네바」에서 열린「교회와 사회 세계대회」라든지 이번「바티칸」에서 열린 「카톨릭」신도 세계대회같은 것이다. 이런 대사회참여와 봉사는「사랑의 실천」을 마을의 골자로 한다. 「선고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자체에 그 궁극의 의미를 두는 것이다. 「사랑」은 아무 것에도 방편일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극히 천박하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세계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세계적인 조직체를 만들고 그것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이 유일한 지혜로운 길이겠는가? 불교에서는 오히려 조직을 해체시키고 생활에 직결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종교인으로서 참고해야 할 것이 아닐까?(장병길) 기독교에서의 무교회주의같은 것도 그런 방향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인텔리」에게는 가능하나 대중운동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것이므로 우리는 역시 기구를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한국 기독교의 현황>절실한「교파통합」
우선 한국기독교인의 수를 살핀다면 현재「카톨릭」이 줄잡아 73만이고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를 합하여 약1백50만이어서 총 기독교인 수가 2백20만쯤 된다.
어떤 이는 3백만이라지만 확실하지 않다. 전 인구의 7%정도로 보면 실수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카톨릭」은 해방 후에 배이상 늘었고 기타교파들도 많이 늘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방직후의 감격과 6·25때의 위기와 불안이 심리적으로 작용한바 크다고 본다.
한국기독교인의 수가 급증한 것은 어느 정도 자랑일 수도 있으나 진정한 기독교적 신앙이라기 보다도「샤머니즘」(무속)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지 않은가? 사실「샤머니즘」도 일반 종교의 기본형태는 다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윤리적이 못되고 다만 자연적 욕구 충족을 노린 것이기 때문에 고등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도 이런「레벨」에 머무르는한 다수가 별로 자랑될 것도 없을 것 같다. 기독교의 강점은 높은 윤리성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인격적 갱신이 약속된데 있다고 본다. 「카톨릭」전래의 제의식중에도 그것이 과히 상징적인것때문인지 몰라도 현대인의 눈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많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설교도 그런 점이 많다. 설교후에 그 설교를 들은 학생중의 평과 그이해된 각도를 조사해보면 그 설교의 대부분이 과녁을 제대로 맞힌 화살 구실을 못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미션스쿨」에서의 성경 시간도 대부분 학생들의 마음에 먹어 들어가지 못한다. 「샤머니즘」적 또는 미신적인 인상이 짙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장병길).
「카톨릭」은 「콘스탄틴」시대로부터 각양각색의 전통을 가진 국민전체를 단번에 교회내에 포섭했으므로 그들의「전 기독교」적 요소도 필요에 의하여 교회에 섭취되었고 또 이교적인 것을 「내추럴라이즈」했던 것이 사실이며「프로테스탄트」의 현황도 비판받을 점이 많다. 그러므로 기술학적세대에처한 교회로서 바른 접촉면을 만들려고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교회 재일치운동은 「카톨릭·프로테스탄트」관계보다도「프로테스탄트」제교파간의 재이치문제가 더절실하게 요청된다. 특히 해방후 잔노교회내의 분파는 심한바 있었다. 이제는 자체검토와 아울러 재연합방향에로 지향해야 할 것이 아닐까싶다. 「카톨릭·프로테스탄트」관계는 정신적인 면에서 현저하게 접근되어 가고 있다. 성경번역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도 좋은 일이며 어떤 특수한 경우에 공동집회를 갖는 일에 의식적으로 힘쓰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교세확장을 위한 경쟁 같은 것은 피차 각별히 삼가야 할 것이다.
「카톨릭」은 아직 기구 적으로 WCC에 가입하지 않았으므로 한국에 있어서도 기구 적으로 한 조직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일치를 위하여는 기구보다도 정신적인 이해와 존경, 그리고 사랑으로 대하는 접근이 앞서야 한다. 그러므로 기구 적인 일치를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윤성범·김태관)
윤리운동에 있어서 성질서의 문란이 철저하게 나타난다. 가정의 순결과 다음세대의 건전한 성격조성을 위하여 교회는 이 점에서 전통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유홍열). 그밖에 정직·근면·절제 등등 개인윤리는 여전히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사회윤리에 대한 교회의 각성이다. 우리의 개인생활은 어느것 하나 사회관계 아닌 것이 없으며 그 모든 것이 책임적으로 각개인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나라로 말한다면 「건국」의 책임이 우리에게 지워져 있다. 기독교가 민주주의질서를 뒷받침하고 그 건설에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자유·정의·질서가 다 기독교 윤리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부정부패·타락선거등등에 무관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정치·경제·문화·교육 등등에 기독교인이 기독교 윤리적인 사명을 갖고 적극 참여하여 소신을 그 속에 심어야한다. 교인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신앙의 필연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이 사회윤리를 강조하고 사회참여에 용감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선행되어야할 개인인격의 경신, 기독교회의 경신이 더욱 기본적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윤성범).
「크리스머스」축하를 앞두고 방종·난잡한 축제기분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엄숙히 예배하고 가정에서 가족 재연합의 즐거움을 갖는 것이 바른 방향이 아닐까? 과분하고 너무 광범위한 선물운동은 미국식일는지몰라도 우리에게 합당치 않다. 서구에서는「크리스머스」날 까지는 공개적인 「크리스머스」기분조성을 금하고 오직 내적으로 마음준비에 치중하며 선물도 가까운 가족끼리 간소한 것을 교환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있다(김태관). 그러나 한국같이 너무 가라앉고 침체된 사회에서는 좀더 축제기분을 조장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히려 축제 적이면서 그것을 선도하여 불우·불행한 이웃돕기운동, 봉사를 위한 각종「그룹」활동 등을 장려하고 교회로서도 화려한 「행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그런 방향으로 돌리면 좋지 않을까 싶다(윤성범). 일본에서처럼「카톨릭·프로테스탄트」합동으로 시민의 「크리스머스」축제를 시도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심포지엄」차례>
(44) 경영혁명………사회=소진덕 (11월2일게재)
(45) 조세 ……… … 사회=차병권 (11월9일게재
(46) 직업권과사회교육 ………사회= 고영복(11월16일게재)
(47) 도 시 ……… 사회 = 김영동 (11월23일게재)
(48) 생활양식 ……… 사회=김권용 (11월23일게재)
(49) 인 권 ……… 사회=김철수 (12월7일게재)
(50) 외국어·외국문학 ………사회=김진만 (12월14일게재)
(51) 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사회=유홍열 (12월21일게재)
(52) 한국의 사회과학 ………사회=길현모(12월28일게재)
◇이「심포지엄」은 67년도 년중계획으로서 년초에 시작, 오는 28일 52회로 끝납니다.

<매주목요일연재>

<기독교 「심포지엄」>
1967년 12월 9일 본사회의실<무순>
사회 유홍렬(대구대학장·국사)
김재준(한국신학대교수)
윤성범(감리교신학대교수)
김태관(서강대교수·신부)
장병길(서울대문리대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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