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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우리의 미래상을 탐구하는 67년의 「캠페인」| 외국어·외국문학(대표집필 김용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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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국어 교육의 목표> 의식의 확대·이해의 증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상호이해의 지름 길이 되기도 하고, 오해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언어이다. 같은 언어를 가지고서도 별의별 일이 생기는 마당에 외국어를 사이에 놓고 의사소통을 꾀할 때 생겨 나는 일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2차대 전을 전후해서「정치적 의미론자」들이 미국 내에서 소리 높이 말한 적이 있다. 즉 각 국가의 불화와 전쟁으로의 급전은 따지고 보면 상호간의 「코뮤니케이션」이 부족한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를 정확하게 이해, 전달할 수 있으면 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정치적 국사적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소박한 견해라고 해서 조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전연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속의 교통기관과 신속한 통신시설의 덕분으로 세계가 시공적으로 말할 수 없이 축소된 현대일수록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이 커졌다. 그리고 주권국가들간의 외교적·문호적 교류가 날로 늘어감에 따라 외국어 이해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더욱이 기술 개발이나 경제 자립을 통해서 국력을 증진해야할 입장에 높인 국가로서는 선진국가의 문물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절한 소화를 필요로 하는 만큼 선진 국가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한낱 국제적인 노력 균형 관계의 유지를 위한 요청만은 아니다.
주권국가로 독립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철수되는 외국어는 말할 것 없이 자유세계 여러 국가의 언어이며 그 중에서도 영어이고, 불어·독어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특히 영어는 중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중점적인 배려 하에 교수되고 있으며, 전국의 웬만한 대학치고서 영문과를 두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제도상으로도 이같이 인상적으로 다른 어느 과목보다도 열의를 들여 교수되고있는 영어의 경우나 이보다는 못한 물·독어의 경우나 할 것 없이 그 성과는 결코 만족한 것이 못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대학을 나와서도 영어한 마디를 시원스럽게 못한다든지, 영문서류 한 장을 제대로 작성하지 못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의 견해이며, 이것은 사실에서 과히 빗나간 주장도 아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틀림없다.
외국어를 교수함으로써 학생들의 의식의 세계를 확대시키고 외국인의 사고방식 및 감정방식에도 익숙케하여 상호 이해의 기틀을 마련해주며 실용적인 외국어의 사용능력을 길러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선 교양 있고 자유주의적인 선량한 시민을 육성한다는 것이 인문교육의 한 분야로서의 외국어 교육의 목적이며 이상일 것이다. 그런 이러한 목적은 현재의 각급 학교의 실태나 부족한 교사와 시설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요원한 곳에 있다. 한 학급이 20명 이내라야 교사가 부담 없이 가르칠 수 있다는 외국어학습의 조건과는 멀리 70∼80명의 학생들이 득실거리는 교실에선 아무리 유능한 교사라 할지라도 별도리가 없다. 말끝마다 실용적인 산(생)영어를 가르치고 시청각 교사를 하라고 하지만 현재의 제도하에선 불가능하다.
결국은 어느 지점에서 적당히 타협을 하든지 아니면 소위 번역식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는데,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적확한 번역력을 길러준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산 영어를 가르치지도 않고 번역력을 길러주지도 않는 중·고등학교에 배치된 평화봉사당원들의 놀라움과 좌절감은 듣기에도 민망할 지경이다. 학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적어도 외국어교사로서 영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교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외국인에게 더욱 커다란 놀라움을 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외국어교사가 너무도 적다. 대중의 외국어과 출신의 교사의 수는 아직도 많지 않다.
한편 대학의 외국어과 만하더라도 학교에 따라 격심한 차가 있는 만큼 영문과 독문과 혹은 불문과를 나왔다고 해서 바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는 한정된 자질을 가졌어도 계속해서 그 능력을 연마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며 여가를 연구에 바치는가, 아니면「과외수업」에 골몰하는가에 따라서 이상과 현실과의 거리가 줄어들 수도 있겠고 혹은 그대로 지속할 것이다.

<대학의 외국 문학과> 넓은 기초와 어학력
외국어교육과 연구의 이상과 현실과의 거리는 대학의 외국어·외국문학과에서도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그 목적은 물론 고등인문교육의 한 분야로서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수수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와 외국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 곳이 외국문학과라는 일반적인 견해는 망상은 아니더라도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 외국어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그와 같은 목표를 품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는 장차 외국유학을 하겠다든지 외교관이 되겠다든지 혹은 무역계나 언론계에 진출하기 위해서 외국어과를 찾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외국어 습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외국어의 어느 하나를 전공한다는 경우에도 그 선택은 기묘한 연상과 선입감에 좌우하는 경향이 많다. 다소라도「문학적」인 혹은 「창작적」인 소질이 있는 학생은 국문과를 택하고 그 다음에 불문과 독문과 영문과를 택하는 경우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여학생들에게는 불문과 영문과가 어쩐지 생리에 맞는다는 미신이 있다. 또 그러한 적응성의 여부는 제쳐놓고라도 각 외국어과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그 외국어과가 기대하는 조건을 갖추지 않은 경우가 하다하다.
그러므로 외국어·외국문학과는 현재의 교과내용을 실정에 맞추어「현실화」할 필요가 있음직하다. 말하자면 외국문학, 나아가선 문학의 정신적 가치관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알되, 반드시 외국어·외국문학의 교수를 생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는 교양인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교과목을 고치면 어떨까? 이러한 방향전환은 반드시 「상아탑」에서「시장」으로의 전략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대학 상급학년에서의 「전공」에는 적지 않은 난점이 있다. 1,2학년에서 교양필수 혹은 선택으로서 몇 단위의 외국어학점을 취득하고, 갑자기 전공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어학적인 본질이나 기능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없이 한외국문학을 전공하기 시작하고 그것도 그 외국문학에대한 전체적인 이해도 없이 어떤 특정시대 혹은 특정분야 및 특정작가를「전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양두구육에 불과하다. 가령 전공이「세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이라던가 「파우스트」전설이요 혹은「빅토리아조의 비극적 인생관에 나타난 염세주의」이어서, 이 밖의 다른 분야나 문제는 전연 아는바가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전공의 지식을 뭣에 쓸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물론 어떤 사숙하는 작가에 경도 함으로써 점차로 문학전반으로 시야를 넓혀갈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우연히 발견한 특정작가에서 관심이 끝나고 마는 경향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수준에서는 보다 일반적이고 폭넓은 전망을 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양문명의 연원을 이루는 「헤브라이」사상과「헬레니즘」의 고전서 시작하여 중세, 문예부흥 및 근대에 이르는 서양문학사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도가 강구되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식상으로는 특정한 국민문학을 전공하나 관심의 폭은 각외 국문학과의 한계를 넘어서서「유럽」문학, 나아가선 세계문학으로까지 미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공은 이같이 넓은 기초 위에서 대학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대학원과 전문가 양성> 「동혈통번식」의 폐단
그렇게 되면, 현재 대학의 상급학년에서 강의되는 특수과목은 대학원에서 실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의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에서 교수와 학생들에게 기대되는 것이 「르네·웰레크」교수가 「문학의 이론」에서 내세운 기준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어떤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내세울 수 있는 동시에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를 지니고 있어야할 것이다. 특수분야의 전문가의 수가 많지 않은 현실인 만큼 대학원은 각대학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느니 보다는 공동으로 운영하여 많은 두뇌를 집중시키는 것이 한결 효과적일 것이다. 현재 각 대학원이 서로 타대학의 강사진에 많이 기대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수긍이 갈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 수년 내로 유행되고있는「인·브리딩」(동혈통 번식)― 모교출신이라야 모교의 교수가 될 수 있다는―의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능한 졸업생을 선진제국의 대학원에 유학시켜서 두뇌의 보급을 계속할 수 있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또하나 어학전공과 문학전공과의 사이에 넓어져가는 간격을 메울 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 문학교수는 작문이나 회화강의는 말할것없이 어학이론을 외면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런 태도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한편 어학전공자들은 최근의 정밀한 언어이론에 몰두하는 나머지「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체계의 수립이 문학적 가치를 도외시하고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과 어학의 어느 하나로 관심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외국어·외국문학과로 한데 묶여 있는 만큼 상호이해의 필요는 항구적인 것이다.
실제로 영어학사 전문인 교수가 현대문학을 가르치고,「세익스피어」학자가 미국문학을 가르치고, 미국문학교수가 대륙 문학을 똑같은 수준에서 가르치고있는 예는 영·미대학에선 하다하다. 영·미 대학의 과명이 단순히 영어과 독어과 불어과로 되어있으면서 어학·문학을 한데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명심할 만 한 일이다.
그리고 대학의 외국어과나 언어학과에는 고대 어와 영·독·불어가 아닌 현대어의 전문가가 소수라도 있어야 한다. 정치적 이유로 해서 과 설치는 어려운 어문학이라 하더라도 지식의 한 분야로선 있어야 한다. 비근한 예로 이 나라의 40대 이상의 지식인이라면 일본어를 모르는 이가 없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일본어·문학의 전문가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실정이 아닌가? 또 매년 문단과 외국문학계와 출판계에 소동을 일으키는「노벨」문학상 작품만 해도 문제이다. 약소국가의 작가가 수상하는 경우에는 아무도 권위 있는 논평을 가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반드시 「노벨」문학상만을 염원에 두지는 않더라도 보통 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뜻에서의 대학에는 잠재적인 전문가라도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학·문학전문가>회의주의와 패배의식
현재 대학에서 외국어·문학을 교수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구사 회의주의 내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첫째 자연과학에 비하면 인문학이 엄밀성을 가지고 있지않다는데서 오는 회의감이다. 둘째로는 외국어·문학을 연구하는 만큼 아무리 해도 본국인 학자들 따를 수 없고 연구에 있어서도 그들처럼 제1차적 자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2차적 3차적인 자료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창적인 성과을 올릴 수 없다는데서 오는 패배의식이다. 일면 지극히 당연한 이유이다. 그러나 2차 적인 자료만을 이용하더라도 분석적이고 해석적인 업적에 있어선 본국인 에 못지 않는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회의감을 가지고 외국어·문학을 대하는 것은 전문지식을 내세우는(프로페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패배의식을 안은 채 교단에 서고 학생을 지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고 소극적으로나마 「지식인의 배반」을 일삼는 것이다. 교수의 권위는 그러니까 해석적인 수준에서도 연구논문을 계속 발표하고, 최근간의 자료까지도 망라한 각종문헌을 검토한 연구 결과를 강의에 반영시킬 때 인정되어야 한다. 자신은 1편의 논문도 쓰는 일없이 학생들의 논문지도를 맡고, 오직 년공으로 얻은 전임교수직과 명예학위를 가지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학문이전의 행위이다.

<번역과 국문학>국문학과의 관련연구>
외국어·문학전문가는 번역을 통해서 국문학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
현대문학은 항상 현대 이전의 문학과 긴밀히 연결해서 연구되고 이해되어야 하듯이 외국문학은 항상 국문학과 관련시켜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공하는 특정한 외국 문학 외의 다른 외국문학을 외면하고 국문학에 전연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이 많다. 또한 그렇게 다방면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일종의「외도」이며 기껏해야 「아마추어리즘」이며 나아가선 「기득권침범」으로 비난받고 있는 것이 우리학계의 지적풍토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이해할 수 없고 타 국문학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한나라 문학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문학 자체를 모른다는 고백 밖에 되지 않는다. 문학적 감수성이 분명히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라야만 한다.
국문학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며 외국문학의 작품을 번역하여 국문학에 자극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은 어느 의미에선 외국문학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한국작가들이 원문 혹은 번역을 통해서 현대세계문학이 지닌 문제의식이나 기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다.
작가의 정신적 태도뿐만 아니고 우리말 자체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변화를 가져온 것도 번역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예술적 표현의 모체로서의 우리말의 가능성을 가일층 개척하는데도 외국문학자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되풀이 말한다면 국어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은 외국어에 대한 감각도 없는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을 번역하는데 있어선 「번역 곧 반역」의 사태가 생겨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현재와 같은 무책임하고 상업적인 저질의 번역작품의 범람은 어떤 방법으로서든지 시정될 수 있는 비판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야하겠다. 남의 것을 받아들이고 제것을 남에게 알려줌으로써 문학을 통한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것은 세력균형에 못지 않게 평화를 위한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포지엄」차례>
(43) 무대예술 … 사회=여석기(10월 26일 게재)
(44)경영혁명… 사회=소진덕(11월2일게재)
(45) 조세…사회=차병권(11월9일게재)
(46) 직업관과 사회교육…사회=고영복(11월16일게재 )
(47) 도시…사회=김경동 (11월23일게재)
(48) 생활양식… 사회=김원룡(11월30일게재)
(49)인권 … 사회=김철수(12월7일 게재)
(50) 외국어·외국문학 … 사회=김진만(12월14일게재)
(51) 가톨릭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 사회=유홍렬(12월21일게재)
◇이「심포지엄」은 67년도 연중계획으로서 연초에 시작하여 연말까지 총 52회 계속 연재합니다.

<외국어·외국문학 「심포지엄」>1967년 12월 8일 본 소회의실 (무순)
사회…김진만(고대교수·영문학) /이진영(이대교수·불문학) / 주요섭(경희대교수·영문학) /곽복연(서강대교수·독문학) /여석기(고대교수·영문학) / 김용권(서강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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