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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중앙일보 칼라의 눈(101)|칠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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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총애 되찾은 민비>
1989년 정월. 숙종은 드디어 궁인 장씨를 희빈으로 삼을 것을 선언했다. 초혼의 금비를 나이 30에 사별하고 민비(인현왕후)와 재혼한지 6개월. 왕은 후사가 초조해서만도 아니다. 장희빈에 대한 폭풍 같은 사랑 때문이다.
장희빈이 곧 태기가 있어 왕자를 낳자 왕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장씨를 왕비로 들여앉히는 대신 민비로부터 왕비의 옷을 벗겨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만류하는 신하에겐 모두 혹독한 벌을 내렸다.
그러나 사랑이 폭풍 같을 때 종말도 빠르다. 그 기사환국이 있은 지 5년 후. 갑술년 무고옥사 - 무당을 불러 민비 죽기를 빌다가 들켜 장희빈은 몰락하고 그를 두둔해 감싸오던 무리도 한물에 갔다. 그래서 민비는 왕의 사랑을 되찾았다.

<여성의 갈등·모함>
이조 중엽. 구중궁궐 속에서 왕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갈등·반목·모해, 그러면서도 불같은 정열을 사랑과 모험이 가장 격렬하게 표면화한 시기였다. 역대군왕으로 후궁을 두지 않은이 있으랴만 이 무렵은 또 사정이 달랐다. 비록 정비와 후궁의 신분은 엄격할지라도 그 자손에는 적서를 차별치 않았던 왕가의 윤리. 그렇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건 인지상정. 대망과 비정의 이율배반. 소용돌이.
이름 없이 스러져간 그 숱한 역대의 궁중 여인 가운데 정말 「하늘의 별」을 딴 후궁의 모습을 오늘 칠궁에서 본다. 이조 5백년을 통틀어 7명. 왕의 생모이긴 하나 타고난 비천한 신분 때문에 종묘에 들지 못하고 여기 외따로 모시게 된 것이다. 서울 시내 궁정동 1번지. 북악에 등대고 앉아, 옛일을 까맣게 잊은 듯 한 울안에 오순 도순하게 모여 있다. 그들의 복잡다난한 사연에 비하면 쓸쓸할 이만큼 조용하고 온화한 칠궁이다.

<최나인 독살 기도>
장희빈이 민비를 내쫓고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 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와이 야순하는데 한 나인(몸종)의 방문에 이상한 그림자가 비쳤다. 왕은 급히 『저는 일찍이 민중전을 모셔온 몸이 온데 오늘이 마침 생신날이오라 평소에 좋아하시던 음식 몇 가지를 차려놓고 추모하옵는 중이 오이니다.』이가 바로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 감심한 숙종이 이때부터 최나인을 가까이하여 임심하자 장희빈은 그를 독 속에 넣어 살해하려고 했다.
영조의 후궁 이영빈은 뒤주대왕 장조의 어머니. 같은 처지의 후궁인 문숙의의 찹초로 인해 아들이 사해되자 그 심화로 해서 이태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와 비애가 엇갈린 그들의 생애요, 어쩐지 「시니컬」한 울타리 안이다.

<영조와 육상궁>
칠궁은 처음 영조가 1725년 생모인 취숙빈이 돌아가자 사당으로서 육상궁을 마련한데서 비롯한다. 칠궁을 육상궁이라 이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후 고종 초년(1870)에 장희빈과 영조의 두 후궁인 이영빈·이정빈의 신위를 이곳에 함께 모셨다가 이안. 고종은 말년(1908)에 다시 시내 도처에 산재한 후궁의 묘사를 한데 모셨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들 영혼이 시샘과 한도 사그라졌으리라 생각한 것일까. 여기에 이한씨의 생모인 엄순비까지 자리를 같이 함으로써(1929) 모두 일곱 분의 묘사가 된 것이다.

<철거 위협에 직면>
그러나 칠궁은 지금 조용하지도 화평하지도 않다. 산 꿩이 날아와 『푸르륵-』낙엽을 쓸고 가고 다람쥐가 인기척을 두려워 않는대서 가장 조용한 담안이라 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외관일 따름. 칠궁은 거기 모신 여성들의 착잡한 생애처럼 주위의 끊임없는 위협 때문에 몸서리치고 있다. 세검정에서 넘어 닿는 길이 뒤통수를 친다. 앞에선 신작로가 턱을 받치며 삿대질을 한다. 꼭 가슴 복판을 꿰뚫어 지나가야겠다고 아우성이다.
서울시는 지난 1년 동안 세검정∼효자동간의 대로를 만드는데 칠궁의 일부를 철거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다. 국사건설의 대 역사에 문화재도 아랑곳없다는 태도. 시 당국자는 말한다. 『시궁이 무슨 문화재냐』『뜯어서 딴 데 지어주면 되지 않느냐』.

<사적 149호>
그래도 칠궁은 엄연한 지정문화재. 사적 149호. 문화재 관리국은 이를 보존해야 한다고 맞서 옥신각신이다. 「국토건설종합계획법」보단 「문화재보호법」이 선행한다. 길은 돌려 낼 수도 있는 것. 예산부족을 「커버」하기 위한 암수다. 종묘와 더불어 이것은 귀중한 묘사제도의 표본이다. 이러다간 남대문까지 헐자고 하지 않겠는가고 만만찮게 항의한다.
학계서도 긴장된 태도를 보인다. 국학 관계학자들을 중심으로 수호를 위한 국민 운동이라도 벌일 기세다. 고적에도 근대화가 해당되는가. 칠궁이 어찌 이왕조의 문화재적 가치가 측정되겠는가. 건축에 바쳐진 우리민족의 표현애와 구조미의 전형을 그 우아한 칠궁의 재실이나 사우의 배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그를 둘러싼 정원은 건물과 담장, 빈 마당과 축석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높은 안목으로 꾸민 것.
더구나 이조말 이후 조금도 손댄 데 없이 보존한 한국식 정원의 유일한 전형이 칠궁이다. 우리의 조원 양식의 산 규범으로서는 물론 6백년 고도의 관록이나 위신으로서는 이런 유적은 일본 일석에 이르기까지 원장대로 보존돼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다.

<고유의 조원양식>
혹자는 묻는다. 우리나라에 고유한 조원 양식이 있는가고, 외국인들은 아예 일본 정원의 모조품이라고 혹평한다. 요즘 자연석을 두리둥실 배치하는 유행을 보고하는 말이다. 그것은 고산수의 흉내.
세계에 내놓고 뽐내는 일본의 조원은 일찍이 백제의 성천화사가 전한 책산입석법으로 시작한다. 일본 사찰에 비장돼 오던 「작정기」나 「산수병야형도」같은 정원 꾸미기 전래비법속에는 확실히 한국 정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 여기저기 발견된다.
집 뒤에는 가산(평지 터)을 쌓는다. 마당 가운데 또는 문이 향하는 마주에 큰 나무를 심지 않는다. 울안에 단풍나무를 두지 않는다. 마당가로 우물을 열고 혹은 연못을 둔다는 등등.
한국 가정에는 애당초 조원의 가르침이 불필요한지 모른다. 택기 그 자체가 고유한 정원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산을 쌓지 않아도 뒤에는 돈대가 있기 마련. 담은 지세가 생긴 대로 높 낮고 굽어 있다. 후원에는 샘을 뚫어 물을 받고 그 곁에 초정을 지어 운치를 돋우는 것조차 생활의 필요 때문이다.

<격조도 어울려>
칠궁은 그대로의 격조에 어우러져 있다. 냉천과 냉천정, 모정과 반송, 장대석으로 축조한 연지와 석축, 사괴석을 가지런히 쌓은 위에 전으로 끝동을 사뿐 올린 담. 상록수는 가옥에서 좀 떼어놓고 정작 화단에는 나지막한 화목들로 사시 꽃피운다. 조원이라기보다 축소해 도입한 자연의 모습이다. 화목은 이제 추해졌을망정 옛 규모와 격조가 생생한 칠궁 뜰이다.
이옥조의 몰락과 더불어 날로 퇴락해 가는 칠궁. 삼문은 첩첩이 닫힌 채 들어서는 이 조차없다. 제사도 물론 끊인 지 오래다. 관리 당국은 미처 손을 못써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잡초가 우거졌다. 밖에서는 아우성이 빗발치는데 내당의 영혼들은 이 싸늘한 날, 얼마나 을씨년스러울까. 글 이종석 기자 사진 김준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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