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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면 기술 다 배워 우리가 공단 접수할 수 있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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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연간 9000만 달러의 수입이 들어오는 개성공단을 폐쇄할 수 있을까. 2004년 공단 가동 뒤 지속돼 온 북측 불만의 흐름을 짚어보면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북한은 실제로 공단 착공 전부터 ‘폐쇄와 그 이후’를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처음 나왔다. 평양의 경제·무역일꾼 특별회의에서 노동당 과장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탈북자 김종인(가명·48)씨의 전언을 들어 본다.

2003년 봄,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 당·군·내각 소속 500여 명의 경제·무역 일꾼이 긴급소집됐다. 회의장을 메운 그들은 소속별로 자리를 잡았다. 주제는 남북경제협력, 회의 주체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경공업부였다. 참석자는 간부급으로 국한됐다. 인민위원회에서는 각 도의 국장급 이상만 왔다. 외화벌이 조직의 경우 군에서는 신흥무역(국가보위부)·광명성회사(호위국)·록산회사(국가안전부)의 사장급이, 당 산하 무역기구에서는 모란총국·대성총국 총국장이 왔다. 내각에선 무역성 관계자가 왔다. 단상인 주석단에는 노동당 경제 담당 과장, 내각·경제부문 일꾼과 지도원이 앉았다. 노동당 과장은 내각의 상(장관)을 쥐락펴락할 만큼 힘이 있다.
먼저 중앙당 과장이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첫 주제인 개성공단에 관해서였다.

27일 개성공단에서 귀환한 최연식 개성공단 법인장을 마중 나온 화인레나운 박윤규 사장(오른쪽)이 직원과 함께 눈물을 닦고 있다. 박종근 기자

“개성공단은 100% 조선에 이익”
“위대한 영도자의 광폭정치에 따라 남조선과 경제협력을 하게 됐다. 개성에 공업단지를 건설한다. 북은 근로자를 대고 남은 설비를 댄다. 공단에서 근로자가 월급을 받고 또 질 좋은 물건도 공급받을 수 있어 인민생활이 향상된다”고 했다. 공단 착수 일정도 밝혔다. 그런 발표를 15분 정도 한 뒤 “당이 방안을 마련했지만 더 좋은 방도가 있는지 인민의 의견을 들으려 한다. 자연스럽게 말해 보라”라고 했다.

처음엔 다들 머쓱했다. 그런데 회의장 중간쯤에서 누군가 일어나 물었다.

“지금 가장 큰 우려가 남북관계가 나빠지면 개성공단이 무의미하게 된다는 건데 어떻게 하겠는가.”

당의 과장은 “동무들이 왜 그런 걱정을 하는가”라고 가볍게 퉁을 놓으면서 “개성공단은 100% 조선에 이익이 된다. 남북 관계에 상관없이 3년만 하면 우리가 기술을 다 배워서 접수할 수 있다. 남조선은 투자한 것도 못 가져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고가 그렇게 했 잖아”라고 말을 이었다. 그가 말한 ‘1960년대 찌또가 쓴 방식’은 이렇다. 찌또는 북에서 요시프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찌또 방식은 ‘사회주의 국가에 자본이 투자돼서 공장을 운영했다. 몇 년 뒤 세금을 세 배로 부과했다. 자본주의 회사는 나가려 했지만 어렵게 됐다. 설비를 뜯어서 가려 해도 돈이 많이 들고 그사이 노후돼 가져갈 필요도 없다. 그러면 사회주의 국가는 그걸 사용한다’는 것이다.

당의 과장은 “3년 뒤 남북관계가 깨져도 접수해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면 좋고 안 돼도 인민에게 물건을 공급하면 된다”고 했다. 아무도 여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다른 질문이 계속됐다.

“생산된 제품의 판로는 어떻게 되나.”
“남조선에서 알아서 할 거다.”

과장은 그러면서 남한 경제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덧붙였다.

“남조선이 지금 Made in Korea로 세계적 인증을 받았다. 삼성과 LG가 따그다(당시 북에선 휴대전화를 이렇게 불렀다)를 만들었다”면서 “여기 남조선 따그다 쓰는 사람 누구 있나”라고 묻기도 했다. 당시 북에선 삼성 휴대전화가 유명했고 삼성 TV도 금강이나 아리랑이란 이름을 달고 반입되던 때였다. 질문이 이어졌다.

“어떤 공장이 들어오나. 휴대전화 공장도 들어오나.”
“나도 자세히는 몰라. 방침 다 나갈 거야.”

과장은 “남조선은 적대국가다. 장군님의 광폭정치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허점을 보여주면 안 된다. 사상적으로 철저히 선발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안 된다. 따로 지시문을 내릴 것이다”라는 주의사항도 덧붙였다.

20여 명이 질문하면서 열기가 후끈했고 1시간30분이 빠르게 흘렀다. 다음 주제는 경의선 철도 연결 문제였다.

자산 몰수→자체 가동, 금강산 관광 전철 밟나
중앙당 과장이 “경의선 철도를 연결하고 임대료를 받는다”며 간단하게 설명한 뒤 질문을 받았다. 철도청 측이 나섰다.

“측량기 같은 설비가 낡았다. 인력도 없다.”
“당신이 왜 그런 신경을 쓰는가. 남조선에서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라.”

특별회의 뒤 다들 ‘100대 버스’를 타고 옥류관 냉면집으로 갔다. ‘100대 버스’는 김정일이 인민들 행사에 쓰라고 선물한 버스 100대라 해서 그렇게 불렸다.

옥류관에서 참석자들은 가볍게 흥분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편에선 “남북관계가 좋아지나” “먹을 걱정 안 해도 되는 것인가” “우리도 남조선 제품 쓰겠네” 같은 기대 어린 의견이 있었다. 다른 편에선 “정세가 손바닥 뒤집히듯 하는데 제대로 되겠나” “(북이) 투자 뒤 뺏어먹을 거다”라는 반응이 있었다. 외화벌이를 하는 김씨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남조선 멍청이들이 호랑이 입에 고기를 넣는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이 노동당 과장의 발언은 꼭 10년 뒤 예언처럼 실현돼 가는 모양새다. 특히 금강산 관광사업의 악몽 때문에 더 걱정된다. 북한은 2011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뒤 현대아산의 재산권을 강제 몰수하고 이어 중국관광업체와 ‘금강산 국제관광’ 사업을 시작했다. 금강산호텔, 온정각 등 남측 시설을 무단 사용하고, 남측 기업이 남긴 차량과 호텔 비품을 일방적으로 가져갔다. 현대아산 건물은 중국 관광객 숙소로 쓰고 있다.

이처럼 개성공단도 ‘남측 자산 동결·몰수→현대아산의 개발 독점권 회수→자체 가동’의 길을 밟을지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전기 문제 때문이다. 북한의 전기가 남측 기계를 돌릴 만큼 양질이 아니어서 남측이 전기를 끊으면 기계가 상하고 결국 공단은 재기 불능 상태로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편에선 ‘개성공단 10여 년 동안 많은 북한 근로자가 기계 작동법을 배운 만큼 불가능하다고만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말한다.

안성규 기자, 이금용 객원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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