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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기련 대령 이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영원한 아웃사이더」 「한국의 방랑아」 「포대령」 등 기묘한 별명을 지닌 채 6년전 겨울 약수동 고갯길에서 쓰러진 고 이기련 포병 대령의 유해가 13일 가매장 됐던 수색 행려병자 공동 묘지에서 태릉 숲으로 이장되었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평안히 잠들어라』- 좌충우돌, 저항만을 아는 듯 기이한 일생을 마친 이 대령은 그를 사랑하는 군 동기생, 문인, 성대 동창생들의 우정으로 안면하게됐다. 1916년 1월 29일 평남 양덕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고보와 경성 제대를 졸업한 뒤 이리저리 떠돌다가 해방 후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었다.
육사 3기생으로 장교로 임관된 그는 4·19후 예비역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갖가지 일화를 남겼다.
1·4 후퇴때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들 틈에 괴뢰군이 섞여 오는 것을 발견한 미군사 고문관이 포병대장이었던 그에게 무차별 포격할 것을 졸랐다.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동포가 섞여 있으니 못 쏘겠다』 『쏴라』 『내가 지휘관인데 무슨 소리냐』- 그는 차고 있던 권총으로 군사 고문관을 쏘아 중상을 입혔고 이 일로 파면까지 당했다.
파면 당한 뒤 그는 맨발에 농구화를 신고 「러닝」만 걸친 채 대구 남문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했다. 친구들은 영·독·불·중·일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고 남다른 재질을 가진 그에게 취직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남의 밑에서 살기 싫다』는 이유로 막무가내였다.
휴전직전 전투망실 보고를 너무 많게 하고 무단히 진지를 이탈했다는 고문관의 보고로 군법 회의에 회부됐을 때도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사병들을 따뜻하게 입히고 재우기위해 망실품을 많게 보고했다. 진지를 이탈했다는데 고문관이 나를 따라다녀야지 지휘관인 내가 그를 따라다니며 「나 여기 있다」고 보고해야 되는가?』 이 대답으로 그는 두 번째 군복을 벗게 됐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내의는 물론 양말 「팬티」까지 벗어 주곤했다.
그는 61년 1월 27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버스」값이 없어 금호동까지 걸어가던 길에 길가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제 그는 옛 전우와 동창 및 친구들의 발기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선성리 「우정의 정표」라고 새겨진 돌 밑에 잠들었고 15일 하오 1시 조계사에서 천도식을 올리고 묘비 제막식을 갖는다.
유족으론 동대문구 제기동 321의 5에 방 2간을 세 내어 사는 5형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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