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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충격영상 '배틀로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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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사람이란 건 주먹을 휘두르면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어느 영화감독은 이렇게 일갈한 적 있다. 영화의 폭력성 논쟁은 역사가 깊다. 이미지와 대중매체의 권력, 그리고 영화에 있어 연출자의 시선 개입문제는 폭력논쟁과 맞물려 늘 이야기되곤 하는 것이다. '배틀 로얄'은 어느 정도 충격요법에 기댄 영화다. 목과 손이 잘려나가고 총탄이 가슴을 관통하는 등 폭력장면은 꽤 섬뜩한 구석이 있다. '배틀 로얄'의 충격효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다른 구차한 설명없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즐겁게 외유를 떠난 학생들은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뒤엔 이렇다.

이건 뭐야? 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있는 거지? 선생이 우리에게 호령하는 이유는 뭐야.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다니......'배틀 로얄'의 학생들은 이상한 일을 체험한다.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에 던져지는 것이다. 너무나 잔인하게도 모든 반칙이 용인되며 단 한사람이 승자가 되는 게임이다.

'배틀 로얄'은 영화를 둘러싼 추문이 더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서 이 영화는 찬반논쟁은 물론이고 폭력장면, 잔혹한 설정 때문에 정치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청소년들끼리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영화감독에 대해 알고 나면 영화에 대한 태도는 달라질수 있다. '배틀 로얄'을 연출한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일본 장르영화의 거장이다. 그는 야쿠자 영화라고 불리는 일본 액션영화를 연출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는데 '의리없는 전쟁' 같은 시리즈는 야쿠자 영화의 신화다. 뒷골목 건달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빠른 이야기 전개, 그리고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곤 했던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일본식 액션영화의 대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배틀 로얄'은 그가 만든 최근작으로 거센 입소문 만큼이나 상복도 많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설정은 간단하다. '학교붕괴'라는 건 현재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만약 미래 사회에서 이 현상을 막기 위해 정치적인 움직임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가까운 미래의 일본, 등교거부를 하는 학생들의 숫자는 80만명에 이른다. 위협을 느낀 정부는 강력한 법안, 즉 배틀로얄을 제정한다. 마흔명이 넘는 학생들이 무인도로 납치되는데 기타노 선생이 등장해 게임의 규칙을 설명한다. 각자 주어진 무기를 사용해야 하며 제한 구역엔 절대로 발을 들이지 말 것. 제한 시간안에 우승자가 가려지면 게임은 끝이 난다.

흥미롭게도, '배틀 로얄'은 배우를 위한 영화다. 감독으로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가 학생들을 이끄는 교사역으로 출연하고 있다. 다케시는 여기서 정신나간 교사로 나오는데 학생들에게 서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냉정하고도, 손쉽게 내린다. 그리고 시간마다 그들 행동을 체크하고 죽은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보수적인 일본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라고 보면 오해다.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한 '기타노' 선생은 집안에선 무기력한 가장이다. 무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딸에게 전화를 건 그는 이런 반응을 듣는다. "아빠는 멀리 떨어져서 전화해도... 이상한 냄새가 나" 자녀에게 혐오의 대상이며 학생들에겐 빈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 나약하고 한없이 무력한 남성. 기타노 다케시는 이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다. 같은 점에서 '배틀 로얄'은 배우 기타노 다케시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느낄수 있는 영화다.

'배틀 로얄'이 새로운 영화인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최근 일본영화의 문제작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몇몇 B급 영화의 흔적이 배어있는 걸 발견할수 있다. 학생들끼리 무인도에서 벌이는 액션장면은 초라한 구석도 없지 않다. 특수효과는 (최근 한국영화의 특수효과가 빠른 속도로 발전한 것에 비하면) 싸구려 같은 티가 나는 장면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특유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섬뜩하고 비극적인 뉘앙스의 소재를 풀어간다. 아이들끼리의 살인극이 벌어지되, 현재 일본 사회를 이끄는 '어른'들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힘없고 한심하며 미래없는 인종들인지 슬쩍 공격하곤 하는 것이다. 노장의 경지에 접어든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연륜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배틀 로얄'은 현재 일본영화를 대표할만한 영화라고 보긴 어렵다. 상업영화치곤 만듦새가 그리 매끈한 편이 아니며 그렇다고 영화적 야심을 번뜩이는 수작이라고 하긴 곤란하다. 이 영화는 대단한 역동성과 문제의식, 그리고 현재 일본의 상황을 냉정하게 고찰하려는 연출자의 의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점은, 분명히 존경스럽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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