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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풍번문답, 내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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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육조(六祖) 혜능(慧能·惠能, 638∼713)의 행장(行狀·삶의 이력)에서 광효사(光孝寺)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유명한 선문답 중 하나인 ‘풍번문답(風幡問答)’의 현장이다. 혜능은 바람에 움직이는 깃발을 두고 움직이는 건 바람도 깃발도 아닌 우리의 마음이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광효사는 반드시 혜능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 달마가 팠다는 우물인 세발천(洗鉢泉)이 사찰 안에 보존돼 있다. 절의 역사는 거기서 더 올라간다. 기원전 존재했던 남월(南越) 왕국의 왕궁이 바로 사찰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중국 선불교의 역사는 물론 중국사 전체가 얽혀 있는 셈이다.

광저우시 광효사의 혜능 예발탑. 혜능을 기리기 위해 세운 7층 벽돌탑이다. 출가 당시 깎은 혜능의 머리카락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중국 선불교의 육조 혜능은 진작에 오조 홍인 대사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시기 세력을 피해 숨어 지내다 뒤늦게 머리를 깎았다. 탑이 겪은 1300년의 풍상이 느껴진다.

 지난달 25일 늦은 오후에야 광저우(廣州) 도심 한복판의 광효사에 도착했다. 폐장 시간이 임박한 사찰 안은 한산했다. 차츰 저녁 어스름이 깔리면서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새파란 사찰 주지 헝바오(恒寶·29) 스님이 반갑게 객을 맞는다.

 사찰 안에는 영물(靈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노거수(老巨樹)가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1500년 묵은 보리수, 그보다 100~200년은 더 살았다는 가자나무도 보인다. 헝바오 스님은 “저 나무들 중 한 나무의 밑에서 혜능이 머리를 깎았다”고 했다. 그 다음은 예발탑. 혜능의 삭발득도를 기리기 위해 당시 사찰의 주지 인종(印宗) 스님의 지시로 만든 탑이라고 한다. 혜능의 머리카락이 보관돼 있다고 전해온다.

 그런데 풍번문답이 벌어진 곳은 어디일까. 이미 진리를 깨우친 혜능과 소견 짧은 스님들 사이의 바람 같은 선문답이 흔적 같은 걸 남겼을 리 없다. 헝바오 스님은 대웅보전 뒤쪽 그리 넓지 않는 마당을 가리켰다. 문답이 벌어진 곳이란다.

 광효사는 2011년 마당 한 켠에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세웠다. 깃발을 세울 수 있는 돌기둥이다. 해서 지금 광효사에는 1300년 전 당시처럼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풍번문답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움직이는 건 바로 우리들 마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차가운 분별의 눈으로 바라보면 풍번문답의 일화는 흐릿하다. 무엇보다 문답이 벌어진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자료에 따라 다르다. 원로언론인 이은윤씨는 『육조 혜능평전』에서 혜능의 출가 연도가 676년이라고 밝혔다. 문답 이듬해 머리를 깎았다면 문답은 675년에 벌어진 게 된다.

 하지만 광효사에서 제작한 사찰 소개 영문 자료에는 출가 연도가 667년이라고 나와 있다. 출가에서 열반까지 혜능이 교화를 행한 기간이 두 자료 사이에 무려 9년이나 차이가 난다.

혜능 예발탑 전경. 아래 사진은 광둥성 신싱현에 있는 국은사 입구. 생가가 멀지 않은 이곳에서 혜능은 열반을 맞았다. 그의 부모 묘도 조성돼 있다.

 ‘팩트’의 차이는 사소한 숫자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혜능의 설법집인 『육조단경』은 분류자에 따라 3종부터 30종까지 판본이 다양하다. 어떤 이는 3개 판본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반해 어떤 이는 30개 판본이 있다고 본다. 경전 안의 한문 숫자도 판본에 따라 1만2000자에서 2만4000자까지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 중 『돈황본 단경』은 가장 오래 된 판본이다. 733∼80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혜능의 본뜻에 가장 근접한 판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대 후반 국내 불교계에서 단박에 깨우치는 돈오(頓悟)와 차츰 깨우치는 점오(漸悟) 가운데 어떤 수행법이 맞느냐 하는 이른바 ‘돈점논쟁’이 벌어졌을 때 성철 스님이 돈오를 강조하기 위해 토를 달고 번역한 판본도 바로 『돈황본 육조단경』이다.

 한데 이 판본에는 풍번문답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후대의 판본에 등장한다.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혜능 선 사상의 핵심적인 부분도 추가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과연 풍번문답은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만들어진 혜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의 불교학자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은 혜능이 육조의 자리에 오른 ‘역사적 과정’을 상세히 전한다. 『선의 사상과 역사』라는 책자에서다.

 그에 따르면 혜능이 육조로 공인된 건 열반 후 83년이 지난 796년이다. 그전까지 혜능의 남종선(南宗禪) 세력은 혜능이 나타나기 전까지 오조(五祖) 홍인(弘忍)의 총애를 받았던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과 누가 진정한 육조냐를 두고 적통 다툼을 벌인다. 물론 승자는 혜능. 역사의 물꼬를 혜능 쪽으로 돌린 이는 그의 제자 신회(神會)다. 755년 안록산의 난으로 당 조정이 궁지에 빠지자 그는 향수전(香水錢)을 발행한다. 승려 자격을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 상당한 군자금을 마련한다. 이 돈으로 당 조정을 도와 난 진압 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상당한 수완가였던 셈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하는 법. 신수의 북종선은 대가 끊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면에서 혜능의 선불교는 야심 찬 제자들의 노력과 역사의 소용돌이가 겹쳐 만들어진 산물인 것이다.

 깃발 끝을 바라보고 있던 헝바오 스님에게 물었다. 21세기 중국 선불교에서 혜능은 어떤 존재냐고. “영남 지역에서 혜능은 하나의 문화”라는 답이 돌아왔다. “신앙 대상이라고 한다면 종교라는 테두리에 갇히는 만큼 종교를 포함하는 더 넓은 범주인 문화라는 표현이 적당하다”는 얘기였다.

 중국에서 영남은 광효사가 위치한 광둥(廣東)성은 물론 하이난성(海南)성·장시(江西)성 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헝바오 스님은 “당국에서 혜능을 하나의 문화교재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려고 한다”고 귀띔했다.

 답사 이틀째인 26일,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광저우에서 서너 시간을 달려 신싱(新興)현 국은사(國恩寺)를 찾았다. 국은사는 혜능의 생가가 지척인 곳이다. 혜능이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혜능의 열반 후 세 달 동안 법체를 모셨다는 자연동굴 장불갱(藏佛坑)도 멀지 않다.

 소문난 효자였던 혜능은 부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국은사 안에 보은탑을 세웠다. 원래 탑이 있던 자리 아래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면서 탑은 사찰 안에서 자리를 옮겼다. 부처님 사리는 따로 전시돼 있다. 이래저래 국은사는 참배객을 끌어들인다. 혜능의 부모를 합장한 묘도 사찰 안에 있다.

 혜능의 선맥(禪脈)을 이은 걸출한 제자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소위 살불살조(殺佛殺祖), 가불매조(呵佛罵祖)다. 어떤 권위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얘기다. 부모도 예외는 아니다. 혜능의 부모 공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국은사 주지 심인(心印·41) 스님은 말했다. “몸은 출가해도 부모의 정을 잊으면 안 된다, 효를 으뜸으로 쳐야 한다는 뜻이다.”

 인도에서 건너온 외래 종교 불교가 효를 중시하는 중국 문화와 만나 몸을 섞은 대목이었다.

국은사(광둥성)=글·사진 신준봉 기자

◆혜능(638∼713)=달마에서 시작한 중국 선불교의 법통(法統)을 이은 여섯 번째 조사, 육조(六組)다. 문맹에 나무꾼이었지만 『금강경』 한 자락을 흘려 듣고 단박에 깨우쳐 선불교의 핵심 진리가 담긴 『육조단경』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불성에는 남북이 따로 없다)’ 등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설파했다. 참선과 화두를 중시하는 한국 선불교의 법맥도 그에게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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