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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1억 호두’ 멋진 인생 이모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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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논설위원

‘1억 호두’는 전남 장흥의 귀족호두박물관에 있다. 100평 규모의 박물관에 일각에서 육각까지 별별 모양의 호두가 전시돼 있다. 호두는 보통 쪼갰을 때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양각이 기본이다. 돌연변이가 생기는데 육각은 매우 드물다. 박물관장인 김재원(56)씨는 육각호두에 1억원이라는 대담한 가격을 붙여놓는다. 그 옆에 ‘로뎅’이라는 이름의 다른 별종도 있다.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김 관장은 “로뎅은 값을 매길 수 없는 희귀종”이라고 자랑한다.

 한 시인이 읊조렸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 관장이 장흥호두를 ‘귀족호두’라고 불러주기 전에 녀석은 개호두에 지나지 않았다. 300년 된 돌연변이나무 여덟 그루에서 열리는 속이 빈 호두가 지압용 손노리개로 제격이라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20년간의 지방공무원 생활을 접고 박물관을 지어 10년간 호두에 몰입했다. 이름을 짓고 스토리텔링을 하며 논문도 썼다. 그 사이 장흥호두는 백화점에서 한 쌍에 몇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팔려나가는 지역 명품이 됐다. ‘1억 호두’는 김관장 자부심의 표상이리라.

 하와이대·전국대·방콕대·늘산대. 은퇴한 남자들이 다시 다녀야 할 ‘대학’들이다. 하루 종일 와이프만 쫓아다니거나 전철·국철에서 시간을 죽이고, 늘 집에 있거나 산에 가는 중년의 씁쓸한 모습이다. 한국은 지구촌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평균수명이 매년 0.28세씩 느는 별난 곳이다. 은퇴 시점은 ‘늙지’ 않는다. 팔팔한 나이에 이상한 대학에 다니기 십상이다. 블루칼라는 조금 낫다. 볼펜·서류에 매달려 온 화이트칼라의 앞날에는 대개 낭떠러지만 있다.

 은퇴자들은 의기투합한다. ‘돈은 적게 벌어도 좋다. 보람차고 적당히 머리 쓰는 일, 어디 없을까. 자연이 벗이 되면 더 좋고, 이런 일자리 만들어주는 정치인이면 팍팍 민다’. 이들에게 김 관장의 삶은 로망이다. 현재는 소수의 선지자만 누릴 수 있는 성공이다.

 “생명자원 분야는 미래지향적인 일자리 창출의 블루오션”(박세원 건국대 교수)이다. 생명자원은 고부가가치 지식재산이다. 나무·풀·해초·벌레에서 귀중한 바이오원료와 의약재료를 찾아내려는 경쟁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나고야 의정서처럼 자국의 생명자원에 몸값을 매기려는 국제적인 움직임도 이미 시작됐다. 다행히 한반도는 생명자원의 보고다. 자생생물종 수가 우리보다 국토가 넓은 일본·영국과 비슷한 10만여 종으로 추정된다. 이 중 2만여 종만 확인됐다. 정부는 생물주권 시대에 대비해 6만 종까지 그 수를 늘리겠다는 구상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지금 구조로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 우리 사회에는 신종을 찾아내는 소수의 생명자원 박사가 있다. 취미 삼아 자연을 주유하는 다수의 취미족도 있다. 그렇지만 박사를 도와 종을 발굴하는 준분류학자, 생태계 변화를 세심히 감시하는 탐사꾼, 지역 생명자원에 천착하는 지식 농민이 많이 있어야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

 국립생물자원관은 ‘한국 생물다양성 관측 네트워크’를 운영 중이다. 민간활동가와 학술전문가가 손잡고 생명자원을 모니터하려는 시도다. 환경부·특허청에도 몇몇 과정이 있다. 이를 더 체계화하고 확대하자. 국가 미래동력 육성과 양질의 일자리 만들기 차원에서 접근해보자. 업무 난이도에 따라 3개월·6개월·준석사 과정을 만들어 화이트칼라 은퇴자를 재교육해 수천, 수만 명의 생명자원 ‘일반전문가’를 양성해 보자.

 5년 후쯤 매스컴에서 이런 인물 기사를 보게 됐으면 좋겠다. 두꺼비·붉은점모시나비·바다조류 전문가가 된 전직 대기업체 상무, 교사와 교장, 공무원과 기자 등. 김 관장처럼 방방곡곡에 작은 박물관을 세우고 ‘1억 호두’류(類)를 창조하는 생명자원 오타쿠들. 멋진 이모작 인생이 아닐까.

이 규 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