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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문화 읽기] 아파트 시세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또 다시 아파트 가격과 프리미엄에 관한 소식들이 끝없이 들려온다. 듣고 싶지 않아도 방송들은 전한다.

이번에는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의 가격이 내리고 강북 지역의 아파트 분양 열기가 높아졌으며 프리미엄이 몇 천만원씩 붙었다고. 신문도 뒤지지 않는다.

어떤 시장경제주의자는 한 신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파트의 전매와 투기적 매매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한쪽은 아파트를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고 있지를 않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셈이다. 다른 일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 강남에 가서 실제로 강남길을 걷는다. 걷다가 부동산 가게 앞에 놓여 있는 아파트 매매 전세 가격을 써놓은 칠판을 본다. 아래쪽의 흰칠이 벗겨져 나간 낡은 칠판에는 주변 아파트 단지의 이름과 가격이 적혀 있다.

3억3천만원에서 12억원에 이르는 아파트 가격은 지극히 무표정하게 또박 또박 늘어서 있다. 전세 가격도 1억8천만원에서 6억5천만원에 이른다. 거기에 씌어진 금액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비슷한 평수의 지방 도시 아파트 가격의 대여섯 배는 충분히 될 것 같다.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주거 혹은 집의 가격이 아니다.

일종의 공상적 금액이다. 돈을 주고 받고, 사고 파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 숫자들이 나란히 씌어진 칠판은 내게 마치 신문마다 끼여 있는 주식 시세표처럼 보인다.

한번도 자세히 읽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고 숫자들이 나열돼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이것들, 아파트 시세표가 적힌 칠판과 신문에 찍힌 주식 시세표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짜 문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아는 것처럼 문화란 로맨틱한 놀음도 엘리트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문화란 누군가의 말처럼 당대 사람들의 삶의 총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하고 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이다. 그러나 돈은 1만원 짜리, 세종대왕의 얼굴이 찍힌 지폐 몇장이 아니라 추상적인 숫자가 돼야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돈이란 일정한 액수를 넘어야 힘을 얻고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현금을 12억원씩 들고 다니지는 않는 법이니까.

어쨌든 아파트 가격이 적힌 이 낡은 칠판은 우리 문화의 정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말은 비아냥도 비웃음도 아니다. 사실이 명백히 그렇다.

그러니까 부동산 사무소는 단순한 중개업소가 아니라 최고의 문화를 생산해내는 작업실인 것이다.

강홍구 <화가.대중문화 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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