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프로젝트] 5. 김지운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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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분야인 코미디를 그만두고 왜 공포물에 손대느냐"고 많은 사람이 궁금해합니다. 기자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단지 코미디가 잘 먹혔던 것이지, 내가 가려는 방향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안의 다양한 표현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공포 장르 호기심 깊어져

그렇습니다. 관객과 평단은 제가 전에 만든 '조용한 가족''반칙왕'의 웃음을 주목했습니다. 상황과 인물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유머를 좋게 보아주셨습니다.

대중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코미디를 보여주었다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포영화 '장화,홍련'을 만들겠다고 할 때 관심을 끌었나 봅니다.

인사가 좀 늦었군요. 김지운입니다. 내년이면 마흔입니다. '장화,홍련'은 현재 70% 가량 찍었습니다. 6월께 극장에 걸릴 예정입니다. 혹시 지난해 한국.홍콩.태국의 세 감독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쓰리'를 보셨는지요.

제 작품 '메모리즈'가 포함됐습니다. 배우 김혜수가 공포에 젖은 기억상실증의 주부로 나왔지요. 그 작품을 '장르적 실험'으로 봐 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장화,홍련'은 그 실험의 연장입니다. 단편 '메모리즈'에선 긴 호흡의 공포를 살리기 어려웠습니다. 공포의 발생.전개.파국 등을 긴박하게 담으려면 아무래도 장편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공포영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깊어진 거죠. 감독이 이것저것 매만지면서 질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영화로는 호러.스릴러가 제격인 듯싶습니다.

알다시피 '장화, 홍련'은 우리 고전소설이 원작입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고전의 재해석인 셈이죠. 서양에선 그리스 신화나 셰익스피어 비극을 두고두고 변주해 내는데 왜 한국엔 이런 풍토가 없을까 하는 아쉬움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옛얘기 중에도 보편적 감성을 끌어낼 수 있는 소재가 상당하거든요.

영화는 원작과 크게 다릅니다. 계모와 자매 간의 대립구조만 빌려왔습니다. 나머지는 새로 창조한 겁니다. 박색에다 의붓딸에게 매를 드는 계모는 젊고 예쁜 새엄마(염정아)로 달라지고, 딸들(임수정.문근영)의 성격도 몰라보게 가다듬었습니다. 원작이 모녀 간의 물리적 폭력을 내세웠다면 저는 정신적 압박감에 집중할 겁니다.

연출 의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삶의 개화기에 막 들어선 나이, 즉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할 나이에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소녀의 심리를 파헤칠 생각입니다. 그 과정에서 점차 미쳐가는 인물과 붕괴되는 가족도 보여주겠습니다.

원작을 재독하면서 황당했던 건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스크린에선 이 부분이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됩니다. 계모든, 딸이든, 아버지든, 먼저 세상을 뜬 망자에 대한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요.

*** 고전소설 완전히 재해석

저는 '장화,홍련'을 실내극이라고 부릅니다. 영화의 90%가 집안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가구.벽지.소품 등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제작비 27억원 가운데 8억원을 집안 세트를 꾸미는 데 썼습니다. 박광수 감독께서 한번 오시더니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세트"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영화에선 이 폐쇄된 공간이 발산하는 음산한 분위기와 그 안에서 황폐해지는 인물들이 물려 들어갑니다. 객석을 바짝바짝 조여가는 서스펜스를 약속합니다. 색깔에 비유하면 빛바랜 올리브유에 붉은 핏방울이 번져나가는 느낌이 될 겁니다.

탐미적이면서도 싸한 슬픔이 감도는 영상, 거기에 전율스러운 공포가 덧붙여진 독특한 스타일의 호러영화가 최종 목적입니다. 욕심이 과한가요. 새로운 감성의 영화를 만드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새삼 깨달아가는 요즘입니다.

글=박정호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jhlogos@joongang.co.kr

< 김지운은… >

★ 연극 연출:'뜨거운 바다'(1994년)'무비 무비'(95년)

★ 영화 연출:'조용한 가족'(98년)'반칙왕'(2000년)'쓰리'(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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