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붙들다] '나쁜 남자'가 해피엔드였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첫 글입니다. 타이틀로 '영화를 붙들다'와 '영화가 붙들다'를 놓고 무척 망설이다 결국 후자를 택했습니다. 대중문화 딜레탕트를 자처하는 대부분이 영화의 포로가 돼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니까요.

'나쁜 남자'와 '요부'얘기로 글머리를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부정적 면이냐구요□기실 영화는 좀 불온한 장르로 출발했습니다.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인디언 살롱에서 영화를 처음 상영했을 당시 초청 기자 전원이 불참했던 게 상징적입니다. 지식인들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이름의 새 장르를 애써 외면하는 쪽이었습니다.

훗날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영화를 '부족하지 않은 빵'으로 간주할 정도로 긍정적 평가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이 새로운 예술은 과거의 전통과 단절한 채 홀로 우뚝 서서 시대의 잔인한 모습을 들춰내고 있다. 도둑의 소굴에서 태어난 이후 저잣거리의 오락이 돼 진지한 모습의 인간을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는 분명 '나쁜 영화'입니다. 끝 무렵,사창가에서 빠져 나온 한기(조재현) 와 선화(서원) 가 바닷가 모래 위에서 사진의 찢겨나간 조각을 찾아 맞추는 것으로 끝냈더라면 아름다운 영화로 남을 수도 있었을 터입니다.선화의 옛 남자 친구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한기가 서 있는 것을 운명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결국 한기는 여대생 선화를 트럭 짐칸에서 몸을 파는 떠돌이 창녀로 추락시키고 맙니다. 철저한 ' 페니스 파시즘'(남근 우월주의) 이죠.

혹자는 "지겨운 김기덕 식 굿판을 치워라"고 혹평을 하더군요. 하지만 구원의 실마리가 항상 선한 것에서 나올까요. 영화 자체의 완결성을 음미하려는 시도를 미리 포기하지 않는 인내도 필요한 법입니다.

아메나바르 감독의'디 아더스'의 요부 그레이스(니콜 키드만)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두 아이를 베개로 눌러 죽인 후 자살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칩시다. 죽은 자는 당연히 저승이 제격인데도 마지막까지 그녀는 이승의 끈을 놓으려 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같은 삶을 강요하고 맙니다. 이승이 과연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일 수 있을까 되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에겐 자학적 파멸뿐입니다. 영화를 통틀어 딱 한번 나오는 주인공 한기의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라는 대사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디 아더스'의 그레이스도 다른 금발의 요부와는 달리 병적입니다.

대개는 섹슈얼리티를 충족하지만 그레이스의 경우 성적 불만과 억압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이 무의식이 그녀를 '빛 반대편 어둠'으로 몰아갑니다. 그 메타포가 전편에 흐르는 스릴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삶은 추함으로써 더 깊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사르트르의 말을 마저 옮기며 글을 맺을게요. "영화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마치 그는'나쁜 영화''디 아더스'매표소 앞에 늘어선 긴 줄을 미리 본 듯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