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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장 3년째, 런던 명소 사보이 호텔 가보니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경이 훗날 아내로 맞게 되는 미모의 비비언 리를 처음 소개받은 곳,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창 밖 템스강 풍경을 바라보며 ‘워털루 다리’ 등 수많은 작품의 영감을 얻은 곳, 줄리아 로버츠가 “영국에 영원히 머무르겠다”고 밝히는 영화 ‘노팅힐’의 기자회견 장면으로 잘 알려진 곳. 럭셔리 호텔의 원조이자 대명사, 런던 사보이 호텔이다.
1889년 지어진 이 유서 깊은 호텔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출신의 세계적 부호 알 왈리드가 인수한 후 2007년 영업을 중단하고 2억 파운드(약 3200억원)가 넘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인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에 들어가 2010년 10월 재개장했다. 개·보수 공사 뒷이야기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영국 TV에서 방영될 정도였으니 당시 공사에 쏠린 세간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120여 년 역사를 지닌 사보이 호텔의 곳곳을 한국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중앙SUNDAY가 초청 받아 지난달 둘러봤다.

1889년 건축 … 3200억원 들여 개·보수
런던엔 많은 럭셔리 호텔이 있지만 입지 면에서 사보이만큼 독보적인 곳은 없다. 같은 급 호텔 중 유일하게 템스강변에 위치한 덕이다. 깊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의 명물 ‘런던 아이(London Eye)’와 로열 페스티벌 홀, 워털루 브리지를 바라보는 객실 전망은 입을 다물기가 어렵다. 게다가 사보이가 위치한 스트랜드는 관광의 요지이기도 하다.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트라팔가 광장, 코벤트 가든, 피카딜리 서커스 등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안에서 공연·전시 관람과 쇼핑 등이 가능하다.

사보이 호텔의 유래는 12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국왕 헨리 3세가 사보이 백작으로 불리던 피터에게 스트랜드와 템스강 사이의 토지를 하사했고 피터는 사보이 궁전을 세운다. 1870년대에 들어 사업가이자 공연 제작자인 리처드 도일리 카트가 이를 인수해 사보이 극장을 지었다. 작곡가 길버트, 설리번 콤비와 손을 잡고 만든 희가극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돈방석에 앉은 카트는 자신이 묵었던 미국의 멋진 호텔들에서 자극을 받아 1889년 사보이 호텔을 완성하게 된다.
사보이는 당시 런던에서 유일하게 전기로 움직이는 승강기가 있는 호텔이었다. 카트는 리츠 호텔로 잘 알려진 세자르 리츠를 영입해 호텔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렸다. 메릴린 먼로, 프레드 아스테어,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인 폰다, 소피아 로렌, 루이 암스트롱, 비틀스, 밥 딜런 등 수많은 스타가 사보이를 다녀갔다. 명품 브랜드 구찌를 만든 구치오 구치가 영국 상류층의 생활을 익히기 위해 시험 삼아 일했던 곳도 사보이였다.

그런 만큼 사보이엔 오래된 것이 많다. 식당 메뉴, 매니저의 환영 카드 등 수십 년 전 자료를 보관한 ‘사보이 뮤지엄’에서 이들이 얼마나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이를 어떻게 셀링 포인트로 삼는지 알 수 있었다. 가령 1930~40년대를 주름잡던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숙박카드에선 “분홍색 장미 12송이와 동 페리뇽 한 병을 방에 미리 준비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사항을 알 수 있다.
007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이 즐겨 찾았던 ‘아메리칸 바’는 런던 최초의 칵테일바 중 하나다. 로비에 있는 보석 코너 ‘부들스(Boodles)’는 250년 된 가게다. 호텔 홍보 담당인 샬럿 페이스는 “사보이엔 오랜 기간 일해온 사람이 많아 단골들이 편안함을 느낀다”며 47년 근무 경력의 바텐더와 30년 넘게 일해온 은발의 도어맨을 기자에게 소개했다.

인테리어 디자인도 20세기 초 영국을 풍미했던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과 아르데코 스타일 등 전통적인 양식을 현대적인 안목으로 살려냈다. 사보이 측 설명에 따르면 ‘리모델링’보다 ‘복원’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옛 사보이의 정취를 살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인테리어 디자인 총책임자는 피에르 이브 로숑. 파리의 조르주 생크(GeorgeⅤ), 런던의 포시즌, 모나코의 에르미타주, 상하이의 페닌슐라 등 전 세계 럭셔리 호텔의 디자인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 덕분인지 디자인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번 방문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호텔 구석구석에 눈여겨볼 거리가 풍성하다. 복도와 로비에 놓인 도자기와 조각상, 쿠션 등 소품도 뭐 하나 그냥 지나칠 것이 없다. 그렇다고 사람 기 죽이듯 으리으리하거나 과시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강남의 초고층 주상복합이 아니라 성북동이나 평창동의 오래된 고급 양옥 주택을 방문한 느낌이랄까.

7만원 하는 애프터눈티 두세 달 전 예약 끝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은 에드워드 7세 재임기간중인 1901∼1910년에 짧게 유행했던 화려하고 세련된 양식이다.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로비다. 사보이는 특이하게도 프런트를 ‘리딩 룸(reading room)’이라는 방으로 따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로비는 응접실처럼 조용하다.

애프터눈티로 유명한 ‘템스 포이어(Thames Foyer)’에서도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은 두드러진다. 천장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정자 ‘가제보’가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유럽풍 고가구와 이탈리아제 무라노 샹들리에, 실크 벽지 등이 어우러져 우아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스콘과 샌드위치, 레몬 커드와 클로티드 크림, 홍차 등으로 이뤄진 애프터눈티의 가격은 봉사료와 세금을 빼고도 40파운드(약 7만원). 끼니가 아닌 ‘간식’ 개념으로 생각하면 다소 과하다 싶지만 두세 달 전부터 예약이 꽉 차 있을 정도로 관광객들에겐 인기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만 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문화체험을 원하는 젊은이들도 꽤 눈에 띈다. ‘런던까지 왔는데 사보이 애프터눈티를 지나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또한 전통의 힘이 아닐까.

아르데코(Art Deco) 스타일은 녹색과 메탈이 어우러진 큼직한 ‘사보이’ 글자체에서도 확연하다. 아르데코는 1920년대 시작돼 3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짧게 유행했다. 이 양식의 특징은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인 사선과 직선, 도형, 검은색·금색·흰색 등의 강렬한 색상이다. 샴페인 전문으로 이름난 ‘보포르 바(Beaufort bar)’에서도 아르데코 스타일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검은색과 금색으로 세련되고 모던하게 꾸며진 이 바는 이미 런던을 찾는 젊은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자신들의 역사를 상품화하는 감각은 9개의 ‘시그너처 룸’에서도 두드러진다. 윈스턴 처칠, 마리아 칼라스, 클로드 모네, 캐서린 헵번, 찰리 채플린 등 과거 여기 묵었던 유명인 9명의 이름으로 스위트룸을 만들었다. 그저 이름만 딴 게 아니라 헵번의 방엔 초상화와 출연작 DVD를 갖춰놓는 식으로 꾸민 점이 돋보인다. 게다가 친필이 담긴 빛 바랜 투숙 카드를 액자에 넣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센스라니.

스위트룸에 제공되는 버틀러 서비스도 아이디어 상품이다. 버틀러는 영국 상류층이 두던 집사를 말한다.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던 그 시절의 집사마냥 사보이의 버틀러는 얼음을 갖다 주는 잔심부름부터 관광코스 짜기, 짐 꾸리기까지 모든 일을 처리해 준다. 이 서비스는 3교대로 24시간 제공된다. 현재 사보이엔 21명의 버틀러가 있는데 이들은 자체 훈련기관인 ‘사보이 아카데미’에서 6주간의 특별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다. 일부러 고려한 건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전통적 집사처럼 매너만 반듯한 게 아니라 용모도 ‘꽃미남급’으로 준수하다. 이 또한 전통과 현대의 접목일까.

런던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The Sav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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