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스티브 잡스도 울고 갈 한국 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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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주요 기업들의 상반기 공채시즌이 열렸다. 올해는 학점·토익점수·해외연수·인턴 경험 등의 스펙을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 위주로 뽑는다는 게 대세다. 앞다투어 학력 파괴를 선언하고 창의성과 열정, 그리고 넘치는 끼를 평가하기 위해 오디션 방식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채용실험에 나서고 있다. 한마디로 바람직한 흐름이다. 다만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관행이 마음에 걸린다. 입사 지원서에 부모의 학력과 재산까지 써내라는 둥 과도한 신상정보를 요구하는 점이다. 을(乙)의 입장인 지원자들이 이력서를 쓰면서 받을 마음의 상처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0여 년 전부터 이력서에 과도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평등권과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경고해 왔다. 미국 고용평등위원회(EEOC)의 이력서 표준 가이드와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EEOC는 성별·나이·종교 등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사항들은 삭제를 권고하고 있다. 모델이나 연예인을 뽑는 회사가 아니면 키·몸무게도 묻지 못하게 한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이력서 사진이 당락을 좌우한다며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입사지원서용 사진까지 따로 찍는 현실 아닌가.

 신분의 대물림이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입사지원서에 부모의 재산이나 학력 등 집안사정을 시시콜콜 물어보는 기재항목부터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 자기 집에 사는지, 아니면 전세 사는지도 묻지 말아야 한다. 출신 지역을 따지는 본적란도 없애야 한다. 면접과정에서 슬쩍 정치적 성향까지 떠보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개인의 능력만 봐야지 집안 보고 뽑겠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의 역동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은 애플을 성공시킨 스티브 잡스가 와도 떨어질 판이다. 사생아 출신에다 대학 중퇴자가 어디 감히 이력서를 들이밀겠는가. 우리 기업들이 창의적 인재를 원한다면서 입사지원서에 과도한 신상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젊은이들이 취업난에 주눅들어 있다. 그들의 무거운 어깨에 작은 짐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도 쓸모없는 낡은 관행은 당장 폐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