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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 칼럼] 대통령의 '마이웨이' 소통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3호 34면

지난해 12월 20일.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이다. 새누리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의 해산식이 오찬을 겸해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 들뜬 표정으로 기쁨을 나누는 새누리당 의원들 앞에 박근혜 당선인(당시)이 마이크를 잡고 섰다.

 “어제 제가 질까봐 불안해했다는 분들이 있다면서요”라고 물은 박 당선인은 “그래 가지고 어떻게 정치를 하시겠어요”라고 일갈했다. “저는요, 정치 하면서 하도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서 뇌에 근육이 다 생겼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국민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데 무슨 두려운 게 있겠어요? 여러분도 정치 하시면서 그렇게 두려움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참석자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오찬장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고 한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간담이 서늘하더라. 마이웨이로 가겠다는 선언 아니었겠나”라고 회고했다. 그의 말처럼 박근혜 대통령은 이후 줄곧 마이웨이를 걷고 있다. 그 기세가 워낙 세니 새누리당에서 ‘사나이’ 소리를 듣는 김무성 전 원내대표도 4월 재·보선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박 대통령에게 “제가 다시 (국회에) 들어오게 되면 조용히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박 대통령 주변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Not a single person(한 명도 없다)’이다”고 말했다.

 면전에서 할 말을 못하니 나와서 구시렁거리는 의원이 부쩍 늘었다. 기자들을 붙잡고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을 꼬집어달라고 하소연한다. 대부분 남성 정치인이다. 남자들끼리 술 마시고, 치고받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온 의원들이 남녀의 역학관계가 역전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게다가 소통법까지 몰라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직 하마평에 올랐던 한 여권 인사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몇 번 안 좋은 소리를 했는데 박 대통령은 그걸 다 기억하실 분”이라며 “난 원래 남성 대통령에게도 고개 빳빳이 세우고 살아온 사람인데 이제는 여성에게 잡혀 살게 됐다는 생각을 하니 솔직히 정부에 들어가고 싶지 않더라”고 털어놨다. 말은 못 하지만 새누리당 남성 의원 상당수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여성인 데다 말 그대로 국가만 생각하고 따로 챙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정권 재창출에도 관심 없고, 자신에게 주어진 5년을 어떻게 채워 나갈 것인지만 궁리한다고 한다. 반면 박 대통령을 상대하는 새누리당 의원이나 관료들은 다음 총선 공천이나 승진같이 챙겨야 할 일이 많다. 여권의 남성 정치인들이 박 대통령을 두 배로 어려워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발상을 달리해 대통령과 소통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사업가였던 한 남성 의원은 “내 고객들이 주로 여성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남자들과는 다른 화법이 필요했다. 딱딱한 얘기를 편하게 풀어가는 능력,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자세. 이런 것이 절실했다. 노력 끝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 능력을 살려 박 대통령과 대화하니 잘 받아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세상은 변했다. 일방통행식으로 자기 의견을 던지고 무조건 따르라는 화법은 남녀를 불문하고 통하지 않는 시대다. 말하기에 앞서 상대방 얘기부터 듣고, 협상 의제를 꺼내기 전에 뜻이 같은 부분부터 찾아내는 노력 없이는 원하는 것을 얻기 힘든 세상이 됐다.

 박 대통령이 여성이라서, 빚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서 소통할 길이 없다고 포기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오히려 그의 등장을 계기로 시대에 맞는 열린 소통법을 정치인들이 익혀가야 한다. 아쉬울 게 없는 박 대통령을 상대하려면 의원들 역시 ‘사(私)’를 챙기지 않고 직언하는 ‘사즉사(私卽死)’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박 대통령 역시 아무리 듣기 싫더라도 의원들의 고언에는 귀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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