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잘하는 기생 성춘향, 갈데 없는 난봉도령 이몽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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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은 『춘향전』은 지금까지 그 판본만 해도 120여 종에 달한다. 이는 『춘향전』이 암행어사설화와 열녀설화 등 다양한 설화를 흡수해가면서 ‘설화-판소리-소설’의 과정을 거쳐 여러 판본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춘향전』은 단일 작품이라기보다는 작품군으로 보는 게 옳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춘향전』
이번에 출간된 『옛 그림과 함께 읽는 이고본 춘향전』(성현경 풀고옮김, 열림원)은 흔히 이명선 소장 고사본(所藏古寫本) 『별춘향전(別春香傳)』으로 알려진 판본을 그 저본으로 삼았다.

여기서 ‘이고본(李古本)’이란 ‘이명선 소장 고사본’의 준말이다. 이명선 선생은 1940년 이 필사본을 『문장』에 공개하면서 “세상에 이만큼 재미있는 『춘향전』은 보지 못했다”고 한 바 있는데, 그만큼 이 판본은 『춘향전』의 해학을 깊이 있게 되살린다.

다른 모든 고전과 마찬가지로 『춘향전』 역시 원문을 읽어야 그 원래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뒤에 덧붙인 ‘원문 주석’에 실린 원문 문장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아무런 주석 없이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 감각을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예컨대 “황성에 허조벽산월(荒城虛照碧山月)이요, 고목에 진입창오운(古木盡入蒼梧雲)이라 하던 한퇴지(寒退之)” 등 이도령과 춘향이가 첫 밤을 보내기 전에 서로 수작을 거는 와중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한문 고사들이 그렇다.

한국고소설학회 및 판소리학회 회장을 지낸 바 있는 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성현경 교수는 바로 이 원문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옮겼다. 예컨대 위의 문장을 “헐어진 성터에 무심히 비치나니 벽산의 푸른 달이요, 고목에 깊이 드나니 창오의 구름이라 하던 한퇴지”로 고쳐 별다른 주석 없이 『춘향전』 원문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21세기 형 새로운 판본 하나를 더 만든 셈이다.

이렇듯 주석 없이 『춘향전』을 읽게 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춘향전』의 깊은 해학과 맛을 느낄 수 있게 됐다. 열녀로 알려진 성춘향이 광한루에서 그네를 타다가 방자의 갑작스런 등장에 “눈깔은 얼음에 자빠져 지랄 떠는 소 눈깔 같이 최생원의 호패 구멍 같이 똑 뚫어진 녀석이, 대가리는 어리동산에 무른 다래 따먹던 덩덕새 대가리 같은 녀석이, 소리는 생고자 새끼같이 몹시 질러 하마터면 애 떨어질 뻔하였지”라며 욕하는 품이나, 춘향을 만나러 가야하는 자기 속도 모르고 늦도록 퇴청하지 않는 아버지를 가리켜 이도령이 “야속하다, 야속하다, 우리 부친이 야속하다. 남의 사정도 모를 적에야 사또 노릇인들 잘하겠나”라고 한탄하는 모습 등은 등장인물의 생생한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신윤복·김홍도 등의 풍속화가 이해를 도와
또한 이 책은 신윤복·김홍도 등의 풍속화를 여러 갈피에 덧붙여 『춘향전』의 시각적 이해를 돕는다. 이도령이 춘향이를 찾아간 첫날 밤 저녁 부분에서는 서생과 기생 사이의 성거래를 알선하는 주모의 모습을 포착한 신윤복의 ‘삼추가연(三秋佳緣)’을 덧붙여 당시의 정황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옛그림들은 『춘향전』이 단순히 한 개인의 머릿속의 조합으로 이뤄진 옛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의 소산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옛 그림과 함께 읽는 이고본 춘향전』은 고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의 일단을 보여준 중요한 책이다. 올해만 해도 중국 고전인 『삼국지』를 다시 쓰겠다는 작가가 여럿 등장했는데, 신소설작가인 이해조 이래 『춘향전』을 다시 쓰겠다는 작가는 드문 듯하다. 이는 아무래도 『춘향전』과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옛 그림과 함께 읽는 이고본 춘향전』에 이어 다른 고소설들에 대한 현대적 조명이 필요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김연수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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