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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17) 총리 겸 변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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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03년 11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임채정 의원(왼쪽 둘째부터), 정대철 의원, 이태일 전 동아대 총장, 김원기 공동의장, 김근태 원내대표 등이 박수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2003년 10월 17일 오전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 질의. 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그런데 변호사인 노무현 대통령을 변호하러 국회에 서 있었다. 재신임을 얘기한 사람은 노 대통령인데 국회에 나가 매 맞는 역할은 내가 해야 했다. 대정부 질의 분위기는 초반부터 심상치 않았다. 한 의원이 물었다.

 “재신임 정국과 관계없이 책임을 지고 총리로서의 능력에 한계가 왔다고 봅니다. 즉각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총리 자리에 있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언제든지 물러나겠습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지금인데!”

 그의 발언에 의원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꾹꾹 눌러왔던 화가 터졌다. 큰 소리로 외치듯 답했다.

 “여러분이 모두 원하시면 언제든지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나 현 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국정 운영에 차질이 없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화를 잘 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국정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국정은 나라를 운영하는 일이다. 그 엄중함을 잊어선 안 된다. 난 행정가다. 정치인이 아니었다. 정치에 국정이 흔들리는 일을 더는 두고 보기 힘들었다. 질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원들의 발언 수위가 높아졌다. 나를 편드는 사람은 이해찬 의원 등 이른바 ‘노무현계’ 그룹 몇몇뿐이었다.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이 질의했다.

 ▶안상수=총리, 대통령하고 총리의 코드가 맞나. 국민들은 코드가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건=저는 누구와도 코드를 맞추는 일은 없다.

 ▶안상수=대통령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고건=다만 대통령과는 공개적인 주파수를 맞춰 놓고 있다. 누구든지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인 사이클이다.

 코드 공격에 주파수론으로 받아쳤다. 국정을 운영하면서 주파수를 개방해 놓고 누구와도 대화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10월 21일 경제 분야 대정부 질의가 국회에서 열렸다. 주제는 나흘 전 정치 분야 대정부 질의나 별다를 바가 없었다. 박종근 한나라당 의원이 물었다.

 “오늘의 불안한 사태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입니까, 집권세력입니까, 아니면 국회·야당·언론입니까.”

 또 그런 질문이다. 숨을 잠시 고른 뒤 답했다. “노 대통령과 측근과 정부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흘 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물러나겠다’고 답한 나다. 책임을 어디로 미루려고 한 대답이 아니었다. 대통령과 측근은 물론 나를 포함한 정부 각료 모두가 책임져야 할 엄중한 상황이라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재신임 정국의 책임을 노 대통령과 그 측근에게 돌리는 발언으로 비쳤나 보다. 앞뒤 자른 언론 보도만 보면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후폭풍은 컸다. 유연하게 의원들의 답을 피해가던 내가 변했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정치권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특히 청와대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제는 나를 변호해야 했다. 그날 국회에서의 질의·답변 내용을 정리해 청와대에 보냈다. 같은 내용의 문건을 나도 보관했다. ‘오해하지 말라’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국회와 청와대 사이에서 그렇게 살얼음을 걸으며 국정까지 챙겨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피로감은 극에 달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11월 11일 통합신당은 열린우리당이란 이름으로 공식 창당했다. 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 4월 15일)를 앞두고 노 대통령의 선거운동 논란이 번졌다.

 2004년 2월 16일 정치 분야 대정부 질의. 한나라당의 남경필·박진·박종희 의원 등 야당 의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남경필=현재 대통령은 당적이 없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은 스스로를 정신적인 여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친노단체인 ‘노사모’가 어느 당에 우호적이겠나.

 ▶고건=현재 ‘노사모’나 ‘국민참여 0415’나 아직은 법에 위반되는, 특정한 정당이나 특정한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모든 시민단체의 선거 참여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철저히 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박진=노무현 정권 자체가 거대한 불법 선거조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와 걱정이 있다.

 ▶고건=내각은 엄정 중립의 입장에서 17대 총선을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가장 깨끗한 공명선거로 관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국회에 불려나가길 거듭했다. 힘겹기만 한 ‘총리 겸 변호사’ 생활이었다. 덕분에 선거법 전문가가 다 됐다. 국회 답변을 준비하느라 연구한 법전과 서류가 책상 위에 한 가득이었다. 중립내각을 만들어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를 하는 일은 정치적·법적 공방 속에 없던 일이 됐다. 대신 더 큰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왔다.

 3월 11일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돌출 발언을 했다.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 소식이 이어졌다. 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3월 9일 국회에 발의된 상태였지만 의결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3월 12일 오전 9시 국무조정실 간부회의에서도 “폭설 피해 종합대책을 잘 챙겨야 한다”며 일상적인 지시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는 예고 없이 나에게 닥쳐왔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열린우리당

2003년 11월 11일 창당했다. 새천년민주당의 42명 의원이 그해 9월 탈당해 통합신당을 만들었고 11월 열린우리당으로 이름을 바꿔 공식 출범했다. 노무현계 의원들이 중심이 됐다.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의 역풍을 타고 152석의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2003년 9월 민주당을 탈당한 노 대통령이 총선 이후인 2004년 5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3년9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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