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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때 한밤에도 직각보행 지키던 ‘딸깍발이’ 군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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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03면

2007년 6월 5일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캠프 사무실에서 국방·외교·안보 정책자문위원 간담회에 앞서 남재준 전 육참총장(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했다. [중앙포토]

1960년대 중반, 어둠이 깔린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어두운 교정을 한 생도가 절도 있게 걷는다. 곧장 가다 굽은 길이 나오자 몸을 90도로 틀며 방향을 돌린다. 다시 가다 또 그런다. 육사 생도가 지켜야 하는 ‘직각보행’이다. 밤이라 보는 눈이 없어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번에 국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남재준(육사 25기) 생도였다. 65년 1학년 생도 때 그를 처음 본 한 예비역 장성은 “남 선배는 캄캄해도 철저히 직각보행을 지켰다. 남들처럼 적당히 안 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육참총장 출신 남재준 국정원장 후보자

남재준 후보자의 사람됨에 대해 대부분 좋게는 ‘전형적 군인’, 좀 나쁘게는 ‘딸깍발이’라고 한다. 그런 성향은 생도 시절부터 분명했던 것이다. 원칙을 너무 따진다고 해서 ‘생도 3학년’ ‘작은 이순신’ ‘천연기념물’ 같은 별명이 따라다녔다.

“군인은 군복의 명예를 지켜야”
생도 시절에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인연이 생겼다. 당시 육사는 8개 중대로 나뉘어 생활했다. 중대당 1~4학년 30명이 함께 내무생활을 했다. 남재준과 2년 후배인 김 실장은 생도 3중대였다. 당시 같은 내무반이었던 한 예비역 장성은 “둘이 썩 친하진 않았다. 김 실장은 축구를 좋아했는데 남 후보자는 운동 대신 책을 읽었다. 그래도 2년간 같이 살다 보면 연대의식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69년 임관 이후 남재준은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나회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멤버가 아니었던 그는 ‘변방’으로 돌았다. 진급이 잘 되는 작전 특기였지만 강원도 원주의 36사단에서 처음 작전참모를 했다. 그 이전 육군대학 시절 그는 ‘군인정신’을 드러낸다. 79년 하나회 주동으로 12·12 사태가 일어나고 동기였던 김오랑 소령이 저항하다 총을 맞고 숨졌다. 이때 육군대학 교관이던 남 소령은 김오랑 묘소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곤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인은 자기 군복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당연히 ‘진급 누락’이란 불이익을 겪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서광이 비쳤다. 하나회가 척결된 것이다. 이후 그는 수도방위사령관에 이어 국방부 장관 예비 코스라는 합참 작전본부장도 했다. 당시 합참에서 같이 근무했던 비(非)육군 예비역 장성은 “그는 정도(正道)를 지킨다. 그런 이가 계속 있었으면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육참총장 시절 프라이드 손수 운전
군인 남재준은 전반적으로 “답답하다”는 평을 받는다. 골프도 못한다. 그의 ‘딸깍발이’ 성향은 육군참모총장 때 유감없이 드러났다. 일과 뒤엔 오래된 프라이드 승용차를 손수 운전했다. 여기엔 양론이 있다. 한 예비역 장성은 “미국 장성들은 우리와 달리 일과 뒤 관용차를 안 쓴다”고 두둔하나 다른 예비역 장성은 “제대로 일하라고 차와 운전병을 주는데도 소위처럼 처신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소신’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충돌 때 절정에 달했다. 노무현 정부가 군검찰을 통해 장성 진급 비리 수사에 돌입하자 2004년 11월 26일 남 총장은 돌연 사표를 제출했다. 군 통수권자에 대한 항명으로 간주됐다. 그는 훗날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부하들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인답지 못하게 투서질을 했으니 잘못된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예비역 장성은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육참총장이 소신만 고집해 군 개혁과 화합을 저해하고 불필요한 충돌을 빚었다”고 비판했다. 요컨대 그에겐 ‘타고난 군인’이라는 빛과 비사교적·비타협적이라는 그림자가 함께 존재한다.

그래선지 그를 둘러싼 부패·비리의 가능성에는 모두들 고개를 젓는다. 한 예비역 장성은 “그런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고 그게 큰 장점”이라고 했다. 무기산업에 오래 종사해 온 공군 출신 예비역 장성도 “그가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4월 전역 뒤 충남대에서 강의했고 2010년부턴 서경대 석좌교수를 하고 있다. 군사정책 측면에서 그는 “지난 10년간 국정원이 죽었다”며 예비역 장성 모임이 있을 때마다 국정원을 비판해 왔다. 국정원의 대대적 개혁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육사 25·27·28기로 구성된 안보라인은 대북 강경책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7인회’ 멤버인 강창희 국회의장이 그를 박 대통령에게 연결해 줬다는 관측도 있다. 둘은 육사 25기 동기다. 한 예비역 장성은 “둘이 생도 때부터 친했고 육군대학에서 교관도 같이 했다”고 말했다. 다른 예비역 장성은 “ 박 대통령 주변의 하나회 인맥이 소개했을 수 있다”고 봤다. 아무튼 남 후보자는 2007년 박근혜 경선 캠프로 영입돼 안보자문역을 맡았다. 지난해 대선 땐 국방안보 특보를 했다. 한 소식통은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박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상의한 사람이 남재준”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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