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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 생산직, 연봉 4300만원" 정년 없는 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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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여행업계 1위인 하나투어는 얼마 전부터 65세인 정년을 10년 연장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 정년 연장이 사회 이슈가 되면서 올해 경영계획을 세우는 자리에서 ‘우리는 한 발 더 앞서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며 “정년 75세 안(案)도 검토 대상”이라고 전했다. 이 회사는 2005년 ‘잡 셰어링’을 도입하면서 55세였던 정년을 65세로 연장했다. 만 50세가 되면 주 4일을 근무하면서 정상 급여의 80%를 받고, 만 55세부터는 주 3일 일하는 대신 급여의 60%를 받는 식으로 정년을 연장하는 것이다.

 현재는 박상환(56) 회장을 비롯해 12명이 잡 셰어링 대상. 박 회장은 월·수요일에만 회사로 출근한다. 이 회사 양경서 인사팀장은 “임직원 1900여 명 가운데 대상자가 극히 일부라 아직 평가하기 이르지만 인적자원 관리가 한 단계 효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이 회사에선 최근 육아 문제, 학위 취득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잡 셰어링을 신청하는 사례도 생기고 있다.

[중앙포토]

 국내 상당수 기업의 평균 정년은 55세. 하지만 직장인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 정년’은 48.8세, 중소기업 근무자들은 이보다 낮은 48.2세로 나타났다(취업포털 잡코리아 조사). 이런 가운데 정년을 연장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고 있다. 지난해는 현대중공업·홈플러스 등 대기업이 주도했다면 최근엔 중견·중소기업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안과용 의료기기를 유통하는 기산과학은 이달부터 55세인 정년을 60세로 늘렸다. 이에 따라 50대 임직원 다섯 명이 내년부터 혜택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 회사 최동원(53) 상무는 “대학 동기들이 명예퇴직을 시작한 것이 10여 년 전인데 앞으로 7년간 ‘추가 근무’를 보장받았다고 생각하니 지갑이 두둑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강태선(60) 대표는 “전체 50명이 안 되는 작은 회사지만 이젠 고참 임직원의 노하우를 지킬 때라고 판단해 정년 연장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임금피크제 같은 방식으로 급여를 줄이기보다는 당분간 55세 때 최종 급여를 그대로 지급할 계획이다. 피라미드식 직급 구조, 한국식 장유유서형 기업 문화를 감안한 것이다. 내부 유보금을 쌓아둔 덕분에 자금 여유가 있는 편. 다만 기업 실적과 생산성, 새로운 임금 트렌드 등을 반영해 보수 지급 기준을 바꿀 수 있다는 방침이다.

 사실 강 대표에게 정년 연장은 오래 근무할 젊은 인재를 뽑기 위한 ‘고육책’이기도 하다. 그는 “신입사원 한 명을 어렵게 교육시켜 놓으면 대기업으로 옮기기 일쑤”라며 “몇 해 전에는 젊은 사원 10명 중 6명이 빠져나간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대졸 신입사원에게 3200만원의 연봉을 지급하고, 어학 수강·상해보험 가입 등의 혜택을 줘도 지명도 낮은 중소기업이 ‘충성도 높은 인재’를 구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이다. 정년 연장을 통해 구직자에게 ‘오래 같이 일하자’는 메시지를 준 셈이다.

 주물과 단조·금형 등 이른바 ‘뿌리 산업’으로 가면 정년 연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한국단조공업협동조합 강동한(55) 이사장은 “2000년대 이후 뿌리 산업에는 정년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다. 강 이사장이 경영하는 한호산업은 지난해 매출 720억원, 영업이익 20억원이 넘는 알토란 같은 회사다. 그런데 이 회사 임직원 134명 중 정년 55세를 넘은 인력이 16명이나 된다. 강 이사장은 “업무 수행이 가능하면 현장 인력은 나이(정년)를 따지지 않는다”며 “올해 67세인 현장 사원이 연봉 4300만원가량을 받는다”고 말했다. 인천 경서동에 있는 주물업체 대광주공도 마찬가지다. 류옥섭(68) 대표는 “사무직과 생산관리직은 60세가 정년이고 생산직은 정년이 없다”고 말했다. 인상률이 일반 직원보다 낮기는 하지만 이들에게도 해마다 임금을 올려주고 있다.

 국민대 류재우(57·경제학) 교수는 “정년 연장을 법제화하면 기업은 명예퇴직 같은 방법으로 규제를 피해 나갈 것”이라며 “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가령 60대 이상 취업자가 많은 기업에 금융 지원이나 세제 혜택 등을 줘 정년 연장을 유도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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