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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9) 현장에 답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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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3년 2월 27일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찾은 신임 고건 국무총리가 실종자 가족들과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가운데)은 취임식도 미루고 고 총리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사진 고건 전 총리]

2003년 2월 27일 국무총리 취임식을 마치자마자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지하철 참사 현장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내려가려고 자동차나 기차편이 아닌 항공편을 택했다.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은 취임식도 하루 뒤(28일)로 미루고 나와 같이 대구로 갔다. 나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대구 지하철 참사 합동분향소가 있는 대구시민회관을 먼저 가자고 했다.

 보좌진은 말렸다. “유족들이 한창 농성 중이라고 합니다. 가셨다 괜히 봉변 당하실 수 있습니다. 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난 “무슨 소리냐? 유족들과 얘기하는 게 먼저”라고 했다.

 분향소라기보다는 시위 현장 같았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울분에 찬 유가족의 외침이 분향소에 울렸다.

 사고가 난 뒤 현장 관리와 대책이 엉망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2월 18일. 서둘러 화재 현장을 정리한 게 화근이 됐다.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피해자 신원을 확인하려면 현장 보존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대구지하철공사 직원들은 서둘러 현장부터 정리했고, 피해자 시신 일부와 유류품을 지하철 차량기지로 옮기기까지 했다. 유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습한 시신 가운데 대부분(149구)의 신원이 이때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가족이 방화 사고로 숨진 일도 억울한데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사태라니.

 조해녕 당시 대구시장이 설명한 그때 상황은 이랬다.

 “지하철 화재가 일어난 중앙로역을 조기에 청소한 것은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은 가능한 한 가장 빨리 재운행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화재 차량은 이미 사건 당일 화재 진압 과정에서 차량기지로 견인돼 있었기 때문에 역사 정리가 범죄 현장 훼손이라는 인식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고의 축소 은폐 기도라는 돌이킬 수 없는 의혹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뢰를 잃고 수습 불능의 국면을 초래했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 대책을 세우는 일은 시장의 몫이다. 하지만 이미 대구시는 그런 행정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1997년 8월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 때가 생각났다. 김영삼 정부의 총리 시절, 새벽 4시쯤 정부종합청사 당직 사령의 전화를 받고 사고 소식을 들었다. 엄청난 사고였다. 오전 6시30분 비상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한 뒤 이환균 건설교통부 장관을 현지에 급파했다. 이 장관이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과 함께 현지 분향소를 찾았다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환경부 장관을 지낸 당시 이만의 내무부 관리관을 유족대책 지원단장으로 현지에 파견해 사건을 수습했던 기억이 났다.

지난 18일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사고로 딸을 잃은 윤근(65)씨가 13일 대구 중앙로역 추모벽 앞에서 딸을 그리워하고 있는 모습.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이런 대규모 인적 재난은 매뉴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현장 감각을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사안의 문제점부터 파악하고 피해자 유가족과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소통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무릎을 맞대고 유족들의 얘기부터 들었다.

 “대구시를 못 믿겠습니다. 중앙에서 직접 수습해 주십시오.”

 피해자 유족과 대구시민이 갖고 있는 불신, 실종자와 피해자 신원 확인 그리고 안전 시스템 문제. 이 세 가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차관이나 차관보급을 단장으로 하는 중앙정부 차원의 특별지원단을 만들겠습니다. 사고 수습이 마무리될 때까지 대구에 상주시키겠습니다.”

 유족들의 요구를 십분 받아들이는 게 중요했다. 책임자를 처벌해 달라는 요청에 “사건 경위 등을 객관적으로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실종자 인정 사망 심사위원회를 실종자 가족 측과 대책본부 측 동수로 해달라”는 요구에도 “중앙지원단이 그런 원칙을 갖고 일처리를 하겠다”고 답했다.

 한발 더 나아갔다.

 “내일 대구 지하철 사고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요청을 바로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분향소를 나와 지하철 화재 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폐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냄새.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비통한 현장의 기억을 품고 귀경했다. 총리 취임 첫날 오후는 그렇게 대형 참사의 현장 속에서 보냈다.

 다음 날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유족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김두관 장관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 최종찬 건교부 장관, 김화중 복지부 장관,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등이 참석했다. 청와대에서 문재인 민정수석, 권오규 정책수석이 나왔다.

 “어제 현장을 방문한 결과, 사고가 수습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조속히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 강금실 장관에게 지시했다.

 “유가족들이 수사 상황을 믿지 못하고 있어요. 대구지검과 대구경찰청에서 맡고 있는 수사를 대검찰청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철저한 수사를 당부하는 검찰총장의 특별지시도 필요합니다.”

 또 이날 회의에서 유가족이 추천하는 변호사·법의학자 등이 참여하는 ‘인정 사망자 심사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전날 유족들의 요청을 그대로 반영했다.

 지하철 피해를 복구하는 데 국비로 366억원을 지원했다. 전국 지하철 내장재를 불연성 재질로 바꾸고 국가 재난관리체계도 전부 뜯어고치기로 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은 그렇게 어렵사리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부상자와 유가족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얼마나 오래갈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53분 대구 중앙로역 지하철 안에서 발생한 방화사건. 지하철에 타고 있던 김대한(2004년 복역 중 사망)은 휘발유를 담은 페트병에 불을 붙인 뒤 던졌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맞은편에서 달려와 역에 섰던 지하철에도 옮겨 붙었다. 출근시간이라 역사는 혼잡했고 기관사와 역무원이 초동 대응을 잘못하면서 인명 피해를 키웠다. 192명이 목숨을 잃고 151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참사였다. 방화범 김대한은 지적 장애가 있었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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