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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 캠퍼스…미국 리더 키우는 융합 교육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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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정치·경제계 리더를 배출하는 미국 교육의 꽃은 단연 학부 교육이다. 미국 명문대학들은 토론과 기초학문을 바탕으로 한 학부중심교육(Liberal Arts Education)에 가장 큰 가치를 둔다. 최근엔 학부중심교육은 물론 대형 연구대학의 장점까지 흡수한 학부중심대학(LAC: Liberal Arts College) 컨소시엄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대학에 관심이 있는 학부모와 학생이라면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흐름이다. 한국에 LAC를 꾸준히 소개해온 미국대학 입시컨설팅 업체 Real SAT의 컨텐츠 팀(www.realsat.co.kr)에서 최신 미국 대학 정보를 꼼꼼하게 정리했다.

이원진 기자

학부중심대학(LAC·Liberal arts college)에선 학문간 벽을 허물고 융합하는 토론의 힘을 중시한다. 사진은 대표적 LAC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포모나 클레어먼트 컨소시엄 교정을 걷고있는 학생들 모습. [사진 클레어먼트 컨소시엄]

미국 명문 사립대학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 개념에서 출발해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레지덴셜 칼리지란 용어는 우리나라에 없는 개념으로 단순히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의미를 넘어 모든 동료 학생이 기숙사뿐 아니라 강의실·식당에서도 배움을 주고받는 시스템을 뜻한다. 지식을 제대로 습득하기 위해서는 한 학기당 30~40시간 강의로 끝나서는 안 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지식을 토론하며 반복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교수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지식보다 주위 환경과 동료 학생으로부터 얻는 지식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가 깔려 있기도 하다.

 미국 대학이 이런 독특한 기숙사 시스템을 바탕으로 학부중심교육에서 가장 큰 가치는 기초학문의 융합교육(Liberal Arts Education)이다. 이런 교육철학은 최근 전체 미국 대학의 트렌드로 발전해오고 있다. 이는 현대사회의 빠른 변화와 관련이 있다. 에릭 슈밋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2010년 “우리는 2003년까지 만들어진 모든 정보와 같은 양의 정보를 이틀마다 새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아마 지금은 정보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새 정보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회에서는 어떤 새로운 정보도 1~2년은 지나도 구식이 된다. 최근 2~3년 사이 급성장한 소셜 커머스는 이미 유통과 마케팅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비즈니스의 새 트렌드를 형성했다. 페이스북·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정치 판세를 뒤흔들 정도로 성장했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4년간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 1학년 때 배운 지식은 졸업하는 순간 이미 구식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거의 대부분의 미국 명문 대학이 추구하는 학부 교육은 단순히 대학에서 전공을 잘 가르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대학 졸업 후에도 적극적으로 지식을 쌓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강의실과 기숙사·학생식당을 넘어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드웨어란 넘치는 정보를 골라서 받아들이고 판단할 수 있는 비판 능력, 습득한 정보를 활용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논리적인 생각,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문 실력과 커뮤니케이션(소통) 기술, 그리고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까지 종합해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하는 토론 기술 등을 말한다.

 이 같은 기본 하드웨어를 갖춘 후에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얹어 생각의 범위를 넓힌다. 수학·자연과학·인문학·예술·외국어 등 기초학문을 두루 접하며 두뇌를 훈련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국내 대학 교양과목 커리큘럼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다.

 국내 대학에서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것이 A와 B를 섞어 ‘혼합물’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면, 미국 대학의 학부중심 커리큘럼이 추구하는 건 A와 B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특성을 지닌 C라는 ‘화합물’을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학문의 융합을 통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창의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셈이다.

 17세기에는 사물의 관찰을 미술가가 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관찰한 달 표면을 미술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해 ‘달 표면이 고르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학문이 결합해 창의적 결론을 도출하도록 돕는 게 LAC에서의 ‘소프트웨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주 전공에서도 더욱 높은 성과를 올릴 수 있다. 화학자였던 케큘러는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모습을 형상화해 벤젠의 화학구조를 밝혀냈다. 케큘러가 이미 정해진 자연과학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면 불가능한 발견이었을 것이다.

 탄탄한 하드웨어에 고성능 소프트웨어가 탑재되면 응용프로그램을 설치해 자신에게 필요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다. 마치 마이크로소프트(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액티브X(active X)를 설치하는 식으로 사용자 개개인에게 맞는 맞춤 환경을 만들어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과 같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경쟁자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발판을 대학에서 만들고, 사회에서 새로운 분야를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다.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동료 학생과 토론하며 평생 학습을 위한 하드웨어를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는 게 미국 명문 대학의 공통된 생각이다. 일부 명문 대학이 재학생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녹화 형식으로 강의를 공개하는 것도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미국 대학 교육의 트렌드가 점차 학부 중심의 기초·융합 학문(Liberal Arts Education)으로 쏠리다 보니 학부중심대학(LAC) 외에 대학원 위주의 대형 연구대학도 이런 흐름을 따라잡으려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학부중심교육은 태생적으로 소규모 대학에서 효과가 극대화된다. 비판적 토론과 논리적인 사고, 탄탄한 작문 실력은 소규모 클래스에서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레지덴셜 칼리지 시스템 역시 교수진과 재학생이 한데 어울릴 수 있는 가족적 분위기의 소규모 캠퍼스에서 성과가 가장 높다. 교수진은 주로 각자의 연구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학부 강의는 한 학기에 1~2개 정도로 제한하는 대형 연구 대학과 달리 LAC 교수진은 다수가 대학 캠퍼스 내에 살며 학부생 지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MIT나 UC 버클리 대학 등 대형 연구 대학 1학년 강의에 학생 700~800명이 모이는 건 흔한 일이다. 심지어 교수가 보이지 않아 옆 교실에서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모니터를 통해 강의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연구보다 교육에 집중하는 LAC에서는 1학년 때부터 20~30명 이내의 소규모 강의가 이뤄진다. 또 대부분 강의를 조교가 아닌 정규 교수진이 담당한다.

 최근에는 대형 연구 대학에서도 높은 수준의 학부중심교육을 제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예일 대학은 전체 학부생을 기숙사 단위의 소규모 그룹으로 나눈다. 집중적인 기초교육을 하도록 전통적인 레지덴셜 칼리지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다. 대형 대학이지만 교수진을 확충해 교수 1인당 학생 비율을 낮추려는 노력도 많다. 이렇게 낮아진 교수 대 학생 비율은 세미나 형태의 토론식 수업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대부분의 미국 명문 대학이 세미나 강의를 개설해 모든 1학년 학생이 소규모 수업에서 작문, 토론 실력을 쌓은 후 2, 3학년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런 변화와 함께 전통적인 명문 대학은 각 대학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하고 있다. 미국 대학은 대학별 특성이 명확하다. 오로지 성적 순으로 입학이 결정되기 때문에 입학생의 수능 커트라인이 곧 대학의 수준이 되는 국내 대학과는 다르다. 흔한 이야기지만 예일대학에 합격하고도 소규모 LAC인 윌리엄스 등에 진학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만큼 미국 명문 대학의 교육수준이 상향 평준화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형 연구 대학이 LAC의 교육 커리큘럼을 따라가며 소규모 대학의 장점을 최대한 흡수하려고 한다면 소규모 LAC는 소규모 캠퍼스에서 피할 수 없는 단점들을 지역 내 LAC의 연합으로 극복하는 중이다. 다양한 분야의 장서를 고르게 갖춘 대규모 도서관, 첨단 시설의 헬스센터, 야구장 등 체육시설을 공유하며 대형 대학 시설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또 상대적으로 학문적 다양성(전공)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특정 분야에 두드러지는 강점을 가진 대학끼리 연합해 학기 중에도 다른 대학 캠퍼스에서 자유롭게 강의를 수강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런 교차 수강 정책(cross-registration)은 국내 대학의 학점 교류와는 다르다. 방학이나 특정 학기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언제든 해당 대학 재학생처럼 등록해 강의를 수강할 수 있다. 타 대학의 실험시설을 이용하고 연합 동아리 활동으로 경험의 폭을 늘릴 수 있음은 물론이다.

클레어먼트 컨소시엄

학부중심교육

학부중심교육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잘못된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한국에 이런 개념의 교육방식이 없어 이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용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리버럴 아트(Liberal arts)가 교양과목 또는 인문학·문과 등의 단어로 소개되곤 한다. 영어사전의 공식 번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아트(Arts)라는 단어로 인해 예술 프로그램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 의미와 동떨어진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다.

 학부중심교육은 수학·자연과학·인문학·사회과학·예술 등 기초학문의 학제간 학습, 그리고 이를 위한 토론이나 작문 교육에 집중하는 종합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의미한다. 수학·과학·철학·미술에 이르는 다방면의 재능을 보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화가이자 조각가·건축가·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를 떠올리면 된다. 라틴어 ‘artes liberales’는 중세사회의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필요한 기본 요소를 의미한다. 현재 학부중심교육의 목적 역시 비슷하다. 리버럴 아트(Liberal arts)는 인문학이나 교양과목이 아닌 모든 기초학문을 아우르는 학제간 커리큘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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