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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라다이스를…" 한국 온 IOC 위원 감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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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0대에 수리철학에 마음을 빼앗기고 20대에 건축에 뜻을 세운 뒤 40년을 도시 디자이너로 살며 국토에 몸을 던져온 김석철 교수는 그 모든 일을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라 불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근혜 정부 출범을 1주일여 앞두고 “이건 새 정부가 들어서는 분위기가 아니야”라고 찬물을 끼얹는 이를 만났다. 박정희 시대부터 역대 대통령에게 국토개발 전반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김석철(70) 명지대 석좌교수다. “국가 경영이 치졸해”라고 입을 연 그는 “국민이 꿈을 품게 하는 희소식이 없어”라고 일갈했다. 미래 창조는 빈말에 그칠 것인가 걱정이라는 거다. 추위가 제일 무섭다는 그는 막 따뜻한 나라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겨울이면 다섯 겹 옷을 껴입고 일하다가 못 견디게 추우면 남방으로 떠난다는 그는 희망의 봄을 맞고 싶은 새 정부에 딱 세 가지만 건의하고 싶다고 했다. 21세기 한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비책이란 그 얘기를 왜 직접 정치에 참여해 실현하시지 않느냐 했더니 “난 쓰레기통에 들어가 노는 3류가 되고 싶지 않아”라며 빙그레 웃었다.

 - 미소가 일품이십니다. 웃는 사진이 많으신데요.

 “내가 잘 웃어요. 못 들었다는 뜻이죠. 태어날 때부터 왼쪽 귀가 부실해요. 오른쪽 귀를 베고 자면 세상이 적막강산이죠.”

 -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러시아·일본을 엮는 ‘황해 도시 공동체’를 제안하시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당장이라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설득하고 싶다’ 하셨는데 김정은을 만날 생각도 있으십니까.

 “ 이 땅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면 누구라도 만나야지요. 내 목숨이 내 손에 있는 한.”

 10년째 위암과 식도암 등 암을 친구처럼 끼고 살아온 김 교수는 지난해 대수술 이후 방사선 치료를 66차례 받는 기록을 세웠다. 보통 사람은 서른 번 이상 못하도록 돼 있는 걸 살기 아니면 죽기로 대든 것이다. 당시 입었던 방사선 차단용 납 가운을 벽에 걸어놓고 가끔 바라본다는 그는 “내가 어릴 때부터 동네 애들이 별명도 못 부를 지경으로 사나웠어”라고 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여러 차례 대공사를 수주하셨지요.

 “김수근 선생 밑에서 일할 땐데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맡기셨어요. 그 뒤에 서울대 관악캠퍼스 공사 현장에 간 박 전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여의도 했던 그 친구 불러라’ 했답니다. 이런 인연으로 구미 생가 자리에 대통령 자택을 짓는 일을 보게 됐지요.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직접 종이 한 장에 평면도를 스케치해 놨는데 ‘※’ 표시를 해놓고 ‘새마을 취로사업 때 공사할 것’이라 써놓은 게 기억에 남아요. 그러다 10·26이 난 거죠.”

 - 국토개발 전문가의 눈으로 박 전 대통령을 평가하신다면.

 “한반도는 북쪽으로 국경을 확정한 조선 세종 이래 600년 큰 변화 없이 있다가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도시개발의 시대로 접어들죠.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급변하면서 취락이 도시화되고 대규모 도시권이 형성됩니다. 그 과정에서 지속 불가능한 국토개발과 무리한 정책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났고요, 사실 유신 이후 나는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당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 뒤를 보니 1인자와 시다바리(아랫것들)만 남더이다.”

 - 그런 선친을 이어 곁에서 보좌했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저는 새 대통령이 그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전 국토에 흩뿌려 놓은 거점 도시를 구슬에 비유한다면 이제 그 딸이 목걸이를 만들어 가야 할 시점이죠. 바로 메가폴리스, 어반 링크(urban link)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닐까요. 아마도 딸은 아버지가 만든 구슬을 귀하게 볼 것이고, 국민들 또한 부녀의 연결고리를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 새 대통령에게 주고 싶은 세 가지 건의 사항은 뭔가요.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라 이름 붙이고 오래 가슴에 품고 있던 소원이랄까요. 첫째는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 서남해안을 아우르는 메가폴리스입니다. 4월에 중국 칭화대에서 내는 ‘어반 리뷰’에 발표할 예정인데요. 호남과 영남을 융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바닷가를 따라 선 포항·울산·부산·마산·창원·진해·여수에 일본 후쿠오카를 이어 항만과 공항을 접붙인 ‘아시아 크루즈 루트’를 만드는 겁니다. 미래 산업의 핵심 키워드는 관광, 즉 투어리즘 아닙니까. 가덕도에 허브 공항을 세우고 이곳을 크루즈 모항 삼아 세계를 압도하는 남해안 메가폴리스를 이루는 거죠. 가덕도는 토질이 완벽해 공사도 쉬울 거고요.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남해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그럽디다. ‘왜 이 파라다이스를 그냥 놔두느냐’고.”

김석철 교수의 주요 설계작들. ①한국 남해와 일본 서남해를 잇는 메가폴리스 개념도. ②여의도 순복음교회 모형. ③예술의전당 조감도.

 - 영남 해안 일대가 한반도 발전 전략의 아름다운 보물섬이 되는 거군요.

 “난 박근혜 정부가 5년 안에 이 원대한 프로젝트를 이뤄줬으면 합니다. 둘째는 다국적 기업의 석유 자본을 활용하는 겁니다. 오일 머니가 넘쳐나는 쿠웨이트 왕가가 진짜 탐내는 구역이 어디인지 아세요. 러시아·중국·북한 세 나라 땅이 만나는 연해주입니다. 여기 묻힌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 교차 지역에 있는 거대한 호수, 구석기·신석기·청동기 3만 년 지층이 천혜로 남아 있는 곳이거든요. 남쪽 석유화학 공장을 뜯어다 북쪽에 세워 가동시키고 중국의 식량에 러시아가 장악한 바닷길을 조합하는 아이디어를 우리가 내면 해외 자본은 절로 모여들 거라 믿습니다.”

 - 이 모든 일을 직접 다 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내심 점지했어요. 지질학자와 환경전문가들을 만나 구체안을 짜면서 구상을 다듬고 있다가 반 총장이 새 일을 찾으실 때 모시려고요. 셋째는 이명박 후보 시절부터 말한 겁니다. 강은 강이고, 운하는 운하다. 강에 배 띄운다고 운하가 아니다. 동서 관통 운하를 만들어 에너지와 물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자 했죠. 원산에서 인천으로 연결되는 관을 묻어 천연가스를 끌어오면 열병합발전소를 세울 수 있어요. 원자력발전소는 20년, 석탄발전소는 10년 걸리는데 천연가스발전소는 2년이면 돼요. 당장 북쪽 에너지가 한 방에 해결되겠죠.”

 - 영화 ‘건축학개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집을 설계하는 순애보 얘기로 인기를 모았는데요.

 “내 나이 칠십, 아키반 건축사무소 40년이지만 사실 건축가로 산 세월보다 도시 계획자로 일한 시간이 더 많아요. 20여 년 건축 설계를 놓고 있다가 최근 서울 서교동에 각시(마누라)를 위한 집 한 채를 설계했죠. 적극적으로 아름다운 집이라 할까. 득의작입니다. 서울에 해묵은 집이 들어앉은 조그만 땅이 많잖아요. 그 죽어 있는 낡은 땅과 집을 어떻게 새롭게 되살릴 수 있을까 보여주는 한 모델이 될 겁니다. 10대에 수리철학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내가 짓는 집은 건축 역학이 심하게 요동치죠. 건축학개론? 그건 나에게 수학이고 철학이자 윤리학입니다.”

 - 수리철학자의 시각에서 최근 논란이 됐던 서울시청 청사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평하신다면.

 “서울시 신청사는 기존 건물을 남기는 바람에 가설건물같이 됐어요. 공옥진 춤처럼 기괴하게 삐뚤어진 춤을 계속 추고 있겠죠. 동대문운동장 자리를 현대화한 이라크 건축가 자하 하디드를 난 테러리스트라 부릅니다. 자기 스타일을 위해 무지막지하죠.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건 동대문입니다. 남대문보다 오히려 더 서울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미학과 전통미가 있어요. 나 같으면 종로와 을지로에서 들어오는 찻길을 지하 교차로로 만들어 이 일대를 새 서울의 중심으로 삼겠습니다.”

 - ‘건축가에게 습작은 없다. 단지 성공한 작품과 실패한 작품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성공작과 실패작을 꼽으신다면.

 “내가 설계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불이 났을 때 전화가 불이 나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 ‘가만있어라, 사람 안 다치게 다 돼 있다’ 그랬습니다. 최근 음악당에 가서 소리를 들어보니 공간 구조는 ‘이만하면 세계 최고다’ 싶더군요. 한데 미술관은 전시장이 아니라 일종의 소음막이에요. 볼 때마다 안쓰러워요.”

 - 김석철이란 이름 앞에 어떤 명칭이 붙었으면 하십니까.

 “20세기 최고의 어반 플래너(Urban Planner). 스페이스 매트릭스 디자이너. 공간의 체계를 의미 있고 아름답게 만든 설계자. 건축과 도시 설계를 동시에 동등하게 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헬기를 좋아해요. 여의도 설계할 때부터 타기 시작했는데 헬기에 오르면 찌릿찌릿 전기가 와요. 책 읽는 것보다 하늘에서 저 아래 인간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게 더 좋아. 살아 있잖아요. 그들이 더 잘살 수 있게 공간 인프라를 디자인하는 이거야말로 미래 창조 아니겠소.”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석철 교수=1943년 부산 출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김중업·김수근 건축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72년 아키반(Archiban) 건축도시연구원을 창립했다.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와 중국 칭화대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주요 설계작으로는 여의도 개발 계획, 서울대 관악캠퍼스, 예술의전당,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쿠웨이트 자하라 주거단지, 중국 베이징 경제개발특구 등이 있다. 『건축과 도시의 인문학』 『여의도에서 사대강으로』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 1, 2』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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