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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유학생, 면접장서 구직자들 복장에 '깜짝'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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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거리를 걷다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정장차림의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남성은 싱글버튼의 검정 정장, 흰색 드레스셔츠 차림에다 검정 구두를 신고, 여성은 검정 정장 상의에 무릎 길이의 검정 타이트 스커트 차림에 3~5㎝ 높이의 편안한 정장 구두를 신는 식이다. 거기다 서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각진 검정 숄더백을 맨 사람이 많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색의 머리 염색을 하는 젊은이들도 이 검은색 복장을 할 때만큼은 단정한 머리모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복장을 일러 ‘리크루트 수트’(취업 복장)라 부른다. 한두 명이라면 그냥 지나칠 일이지만 10여 명, 많게는 수십 명이 이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일종의 문화충격을 느낄 만도 하다.

일본에서 유학한 A씨는 최근 도쿄에서 취업 면접장에 갔다가 꽤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했다. “면접 대기실에 들어가 보니 모두 똑같은 검정색 정장 차림의 사람뿐이었다. 감색이 섞인 스트라이프 패턴의 단정한 넥타이 차림까지도 비슷해 보였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리크루트 수트를 입고 왔는데, 나만 회색 정장을 입어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일본 회사들이 ‘구직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이런 복장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모두가 획일적인 복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미타무라 후키코(三田村口子)는 2009년 저서 『코스프레-왜 일본인은 제복을 좋아할까』에서 이를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할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일본인의 습성”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인은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튀지 않는, 안정 지향의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다.

일본인들은 어려서부터 빨강ㆍ노랑 같은 원색보다는 검정ㆍ흰색ㆍ감색ㆍ회색 등 차분한 색깔의 옷 입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집단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일본교육의 상징과도 같은 교복이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복에 길들여진 일본인들은 취업 면접 때도 규격화된 복장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장기 불황에 따른 취업난이 구직자들의 복장까지 보수적으로 통일시킨다는 설명이다.

일본에서 리크루트 수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기업의 취업설명회나 입사 면접 때 입을 정장을 구입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여학생들도 면접을 위해 원피스나 투피스 같은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을 한 벌쯤 장만해놓았다.

구직활동이 길어지면 추동복과 여름 정장까지 여러 벌을 구입해야 하는데, 대학생들에겐 적지않은 부담이 됐다. 1976년 어느 날 대학생활협동조합 도쿄사업소에 “기업 취업설명회에 입고 갈 양복을 싸게 단체 구입할 수 없느냐”는 민원이 접수됐다. 대학생협 측이 도쿄의 한 백화점에 양복 개발을 제안했는데, 그 과정을 거쳐 그해 가을에 출시된 ‘대학생 면접 정장’이 일본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양복은 감색이나 회색이 일반적이었고, 드레스셔츠는 흰색과 하늘색이 주류를 이뤘다.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체크나 스트라이프 무늬도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보다는 훨씬 선택의 폭이 넓었다. ‘리크루트 수트’라는 일본식 영어가 정착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다.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전에 채용기회가 많았던 만큼 학생들 사이에서도 지금 같은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취업난으로 돌아선 90년대 중반 이후 리크루트 수트의 규격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몇몇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검정색 리크루트 수트가 유행하면서 ‘리크루트 수트=검정색’이라는 공식이 정착했다. 불황기엔 검은색 옷이 잘 팔린다는 속설이 설득력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본 문부과학성과 후생노동성이 2012년 말 발표한 대졸예정자의 취업내정률(지난해 10월1일 현재)은 63.1%로 조사를 시작한 1996년 이래 여섯째로 낮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류회사들도 리크루트 수트 기획에 열을 올린다. 아오키ㆍ아오야마 등 대형 양복판매회사들은 연중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 대졸 예정자, 청년들을 위해 저가의 리크루트수트를 판매한다. 양복 한 벌에 바지를 하나 더 끼워 파는가 하면 여성구직자의 경우, 바지와 치마 한 개씩 함께 판매한다. 보통 연말에 시작하던 리크루트 수트 기획전을 9~10월에 일찌감치 서둘러 시작하기도 한다.

일본인의 규격화된 복장통일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립 초등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려는 어머니들의 입시면접 복장이 좋은 예다. 심플하면서도 단정한 짙은 감색 혹은 검정색 투피스가 주류다. 아버지도 검정 혹은 감색 정장 차림이다. 이런 학부모 복장은 입학식과 졸업식도 예외는 아니다(입학ㆍ졸업식 때는 흰색 투피스를 입는 경우도 있다).

이런 ‘학부모 제복’의 범람 현상은 “혼자 튀어서 중요한 입시에서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작용한 결과다. 이런 수요에 맞춰 백화점들은 입시와 졸업ㆍ입학 시즌에 맞춰 ‘수험생 어머니 수트 특별전’을 열기도 한다. 필자의 몇몇 지인은 “규격화된 의상이 있으면 오히려 때와 장소에 맞는 의상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스시(초밥)집 요리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리복안에 드레스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요리문화에 한 획을 그은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1883~1959)의 가르침에 따라 스시집 요리사들도 서비스업에 맞는 청결한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리크루트 수트 문화에 대해 “기업들은 자기 주장도 개성도 없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인재를 필요로 하느냐. 그런 인재로는 일본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비난여론도 있다. 이 때문에 10년 전쯤부터 몇몇 IT와 벤처ㆍ의류업계를 중심으로 획일화된 기업 복장문화를 바꿔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해 1월 14~15일 도쿄 빅사이트에서 개최한 ‘2013년 3월 졸업예정자들을 위한 소니 회사설명회’에 앞서 소니는 복장자유화를 선언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의 ‘복장자유화’ 선언은 파격이었다. 소니는 자사 웹사이트를 통해 “‘취업=리크루트 수트’의 공식을 바꾸겠다”며 “굳이 양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자유로운 복장으로 회사설명회에 참석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회사 홍보실은 “인재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있다. 복장 자율화를 제시한 것도 개성을 살리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틀간 열린 회사설명회장에는 온통 리크루트 수트 천지였다. 홍보실 측은 “방문자 5000여 명 중 리크루트 수트를 입지 않은 자율복은 20%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미타무라 후키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여성 사원들의 유니폼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기업들이 여성을 ‘청초하고 단정한, 그러면서도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직장의 꽃’으로 꾸미는 데 유니폼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여성 유니폼이 점점 사라져가는 풍토 속에서 요즘 일본에서는 여성 유니폼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도쿄의 오타쿠의 거리 ‘아키하바라’에서는 ‘메이드 카페’처럼 유니폼을 무기로 고객들을 끌어 모은다. ‘메이드 카페’는 귀엽고 깜찍한 하녀(maid)복장의 여종업원이 손님(주인님)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극존칭을 써가며 주문을 받고 서빙한다. 고객을 부르는 호칭도 ‘고슈진사마(주인님)’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분장하는 코스프레 애호가도 늘고 있다. 미타무라는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일본인은 유니폼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며 “기업의 유니폼은 사라져도 코스프레 등의 다른 형태로 제복문화가 되살아난다. 일본은 세계 최강의 제복국가”라고 지적했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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