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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책과 국민적 자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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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먼 옛날부터 개인의 치부(치부)나, 국가의 번영은 오직 근검(근검)저축하며 어떤 어려움도 참고 이겨 나간다는 이외의 다른 길이 없음을 가르쳐 주고있다. 지금 우리 나라의 경제발전은 놀라운 사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불과 수삼 개월 사이에도 서울근교에는 여기저기 새로 공장이 서고, 길이 새로 나고, 또 시내에도 어떤 거리는 새로운 고층건물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일년미만에 면목을 달리한 곳도 있다. 외국사람들도 놀라고있다. 특히 우리의 원조국가인 미국의 경제전문가며 고위 관리들은 한국경제를 지금「비약단계」에 있다고 대단히 칭찬하기도 한다. 이러한 칭찬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나라의 경제전문가나 학자들 가운데는 아직 비약단계가 아니라고 하며 「인플레」를 경계하여야 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지난 반년동안의 물가가 정부에서 예측하고 낙관하던 이상으로 올랐다는 것을 지적하며 또 제2차 5개년 계획에도 「인플레」의 염려가 많다는 것을 경고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경고는 발전의 의욕이 현실의 여건보다 앞서고 그 때문에 계획자체가 일부 정확 면밀치 못하다는 것인데 이 역시 생산과 아울러 근검 저축의 정책이 더 강력히 추진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견해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비약단계」에 있느냐 아니냐하는 중요한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생산 없는 낭비와 저축 아닌 축재 (축재)의 경향이 거의 방임상태에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제아무리「자유경제」라고 하지만 국가의 경제계획을 떠나서 그 균형과 조화를 해치는 일도「자유」인 것같이 용납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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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1955년 봄, 2차대전이 끝난 지 10년만에 영국은 석탄과 신문용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물자의 통제와 배급제도의 해제를 보게 되었었다. 그때에 비로소「텔리비젼」과 세탁기계가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전 해만해도「호텔」에서는 외국인에 한해서 계란을 먹게 했다. 영국의 유명한 「휘스키」란 술은, 전쟁 중에도 전세계에 판로를 유지했건만, 바로 그전 해까지 영국사람들은 국내에서 겨우 잔술로 사먹었을 뿐 술을 병으로 사두고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영국사람들은 말하기를 작년 이맘때만 해도 오늘 이와 같이 아무런 부족 없이 살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지방의 시립병원에서 보여 준 바는 8백 석의 입원환자 침대를 가지고 있지만, 입원료를 내야하는 환자는 거의 없다고 했다. 이는 전후 노동당 내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보장(사회보장)제도를 강행했던 그 성과이고, 그후 보수당 내각은 이 제도를 충실히 발전시켜 국민생활의 빈부의 차이에서 생기는 중대한 불균형을 메우도록 힘쓰고 있었다.
영국이 전후의 부흥을 보기까지에는 모든 국민에게 국가의 가난을 참고 이겨나가도록 모든 소비를 강력히 억제하는 내핍(내핍)생활을 10년간 계속했다. 생산과 관계없는 개인의 호화로운 주택은 물론, 단순한 사무실을 위한 호화로운 고층「빌딩」의 건설이 용납될 수 없었다. 국가의 번영 없이 개인의 안락과 행복이 있을 수 없고 또 가난한 국민들이 가난 속에 허덕이는 그 위에 돈과 권세만이 영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야경국가(야경국가)라고 저주받던 시대에 영국이 경험하고 남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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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요도시의 50내지 85「퍼센트」가 폭격 때문에 폐허가 되었었다는 패전국 독일은 l957∼8년까지 그 시민의 일부를 방공호나 전쟁 중에 지었던 교외의 판잣집 같은데서 살게 했고 대학도 유리창으로 눈이 펄펄 날아 들어오는 교실에서 공부케 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1959년쯤은 상당히 부흥된 자취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주택사업은 겨우 그 시초에 들어가고 있었다. 미술관 같은 것은 보잘것없었다. 그들의 부흥은 전혀 공장의 재건에서 수출을 목표로 하고 모든 소비를 절약하고 있었다.
1962년에는 세계에「독일」의 이름을 떨치던 공장들이 모두 새로운 시설로 전쟁이전의 능률을 올리고 있었다.
「시멘스」「데마크」「크루프」「차이스」등등. 근2백년의 역사를 가진 이러한 공업단체는 전쟁의 승패나 정권의 어떤 교체에도 초연한 독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쯤은 미술관도, 음악당도, 「오페라하우스」도 굉장한 규모로 도시마다 신축되어 있었고 대학도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국민도 상당히 사치해졌었다. 어떤 공장의 한 간부는 그간의 경위를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공장의 복구는 좋은 기술자 좋은 행정가의 성실하고도 훌륭한 지도력에 힘입은바 크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으나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온 국민의 참고이기는 정신의 덕을 우리는 크게 여긴다. 모든 국민은 어려운 살림 가운데서도 철저히 저축에 힘썼다.
지금 모든 공장은 국민의 저축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국민 저축의 실천은 물가를 억제하면서 생활수준과 국민소득을 높일 수 있고 그리고 생산시설을 더 확대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영국이나 독일의 경우는 우리로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있음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배울 것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정부도 국민도 또 사업가들도 다 한가지로 서로 믿고 의지하고 국가의 한 목표를 위하여 하나의 원리 속에 각기 차지한바 직책에 충실함으로써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일 것이다. 문제는 책임 있는 사람들의 근본자세가 어떤 것이냐를 스스로 검토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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