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가장 좋은 것은 언제나 모두의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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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와 제도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사회의 정파(政派) 간에도 가치 선점(先占) 현상은 흔히 관찰된다. 곧 다중을 설득하기 좋은 이념이나 정책을 먼저 독점하여 권력투쟁에서 상대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향이 그렇다. 하지만 그럴 때도 선택된 여러 이념과 정책들을 결합하는 과정에는 일정한 공식과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공식이나 기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념과 정책들 사이의 친연성(親緣性)과 길항성(拮抗性)일 것이다. 어떤 이념들과 어떤 정책들은 거의 필연적이라 할 만큼 결합이 요구되지만, 또 다른 경우는 결합이 바로 모순이 될 만큼 그 계보와 배경을 달리한다. 아무리 대중에게 인기가 좋다고 해도 사회주의와 사유재산 보장 정책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고, 우파적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는 좌파와 보수주의를 결합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그와 같은 이념과 정책들 사이의 친연성과 길항성을 무시하는 정치적 행태가 생겨났다. 어떤 나라에서는 군부의 우익적 기질과 노동자의 좌파적 성향이 결합하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권위주의와 빈민대중의 극좌적 분배요구가 손을 잡아 정권을 유지했다. 대개는 이른 시일 안에 그 나라 경제와 국민의 심성을 거덜내는 결과로 끝났는데, 흔히 그와 같은 정치행태는 포퓰리즘이라 불린다.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이 포퓰리즘의 혐의를 받게 된 것도 가치를 선점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무리와 모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엇이든 좋은 것, 특히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모두 끌어와 자신들의 정강정책으로 얽은 듯한 인상이 그렇다. 그 점에서는 야당도 크게 뒤지지 않는데, 대선(大選)을 앞둔 시점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집권 2년, 전(前) 정권과 통산하면 벌써 집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와 같이 무리한 정강정책의 원인이 된 가치 선점은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로 위장된 여당의 외각세력은 아직도 좋은 것은 무엇이든 모두 자기들의 이념, 자기들의 정책이어야 한다고 믿고 그 가치 주변을 기웃거리는 상대방에게 광분(狂奔)에 가까운 언어적 폭력을 행사한다. 어떻게 보면 반대파에게는 악역(惡役)만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듣기로 민족주의는 서구의 좌파나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에게는 이미 용도가 폐기된 관념으로 규정된다고도 한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념의 계보도 보수 - 우파 - 민족주의 - 파시즘 - 국수주의로 이어지는 어떤 것이다. 그런데도 개혁의 사도(使徒)를 자처하는 이 진보세력은 여중생의 사고사로 촉발된 민족주의 감정뿐만 아니라, 월드컵 축구로 과열된 스포츠 국수주의에까지 편승함으로써 이 땅의 민족주의를 선점해 버렸다.

방금도 인터넷 구석구석에서나 자기들끼리 돌려보는 노랑신문에서 벌이는 저들의 논전 대부분은 바로 그 선점의 효과를 자기들만의 것으로 지키려는 악다구니처럼 들릴 때가 많다. 특히 민족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두 가지 정치적 현안 - 통일정책과 친일파 문제에 이르면 그들의 배타적 언사는 듣기 거북할 만큼 표독스럽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통일에 대한 논의는 당연히 그들만의 것이고, 통일 희구 세력도 그들 자신뿐이다. 적대자들은 통일 논의는 기껏해야 통일을 반대하는 논의고, 그들의 역할도 반(反)통일 세력이어야 한다. 그들이 적대자로 찍은 인사가 통일을 말하면, 논의의 옳고 그름보다는 네가 감히 통일 얘기를 하느냐며 성나 덤빈다.

최근 들어 부쩍 달아오른 친일파 문제에 이르면 더하다. 자기들이 수구 극우파로 분류한 인사가 독도 문제를 두고 반일감정을 드러내면 그 대상인 일본사람보다 그들이 더 화를 낸다. 당연히 친일파를 해야 하는데 감히 반일을 소리쳐 드러낸 것에 대한 분노, 이미 자기들이 선점하여 누리는 가치에 끼어들려는 데 대한 강렬한 거부의 감정으로 보인다.

가장 좋은 것은 너희들만의 것으로 하고 싶은 그 신선한 열망은 이해하지만, 아이들아, 결코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 몸을 흐르는 피와 대를 이어 살아온 땅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을 오직 저만의 것으로 우길 수는 없다.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