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대 이란 돈 기업은행 계좌서 세탁 사실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중앙일보 2012년 9월 14일자 1면.

기업은행에 개설된 이란중앙은행(CBI) 명의 계좌에서 1조원대의 돈이 위장 거래로 인출된 뒤 해외로 빠져나갔다는 의혹(본지 2012년 9월 14일자 1, 6면)이 사실로 확인됐다. 이 계좌는 이란과의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미국의 제재조치 이후 이란에서 석유를 계속 수입하기 위해 만든 우회 계좌다. 이란 측이 국내 기업에서 받은 석유 결제대금을 원화로 예치하면 나중에 국내 중소기업이 수출한 대금을 정산받는 구조다.

 이 사건을 수사해 온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이성희)는 24일 대리석 중계무역 관련 서류를 위조해 CBI 계좌에서 1조900억원을 빼낸 뒤 9개 나라의 계좌로 송금한 혐의(외국환거래법 위반 등)로 A사 대표 정모(73)씨를 구속기소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수수료 명목으로 170억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거래 허가를 내준 전략물자관리원과 한국은행, 돈을 인출해 준 기업은행에 대해서는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이란과 두바이 등에 있는 회사들이 정씨에게 위장거래를 부탁한 정황은 확보했으나 수사권이 미치지 않아 처벌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미국 국적을 가진 정씨는 2011년 2월부터 이탈리아 등으로부터 대리석을 수입해 이란의 F사에 판매하는 것처럼 서류를 꾸며 기업은행에서 수차례에 걸쳐 1조900억원을 지급받았다. 이란 측 수입업자인 F사가 이란의 두 은행에 의뢰해 인출요구서와 선적서류 등을 보내주면 정씨는 이를 근거로 당국에 수출입 신고절차를 마치고 기업은행에 제시해 돈을 빼갔다. 하지만 검찰 조사 결과 이란이 2011년 두바이에서 대리석을 수입한 규모는 4억원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들여온 대리석도 전혀 없었다. 이를 1조원대의 거래로 부풀렸다.

 정씨는 특히 짧은 기간에 거액을 빼내기 위해 처음에는 석유화학 제품을 중계한다고 서류를 꾸몄으나 금지품목이라는 사실을 알고 급히 대리석으로 수입품을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100만원짜리 질 낮은 보석을 298억원 상당의 루비 원석이라고 속여 돈을 타내려다 적발되기도 했다.

 검찰은 정씨가 이란 관계자들과 조직적으로 공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석유 수입 대금이 우리가 수출한 공산품 대금에 비해 언제나 많다”며 “국내 은행에 묶여 있는 돈을 빼내려고 위장거래를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정씨는 이란 회사들과 수시로 접촉하며 지시를 받았고, 이란 업체가 대금 인출에 필요한 서류를 보내줬다. 인출한 돈도 이란 업체 측에서 지정한 계좌로 송금됐다. 검찰은 이 사건 직후 기업은행의 CBI 명의 계좌를 통한 중계무역 대금 결제가 금지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금융당국이 이번 사안에 대해 조사 중이라서 그 결과에 따라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